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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Sep 27. 2022

강약약강 직원에게 화를 낼 수 없었던 이유


 쨍쨍한 8월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물놀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우연히 시청에서 운영하는 수영장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이 아들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이후로 뭐든 혼자 척척 잘 해내는 아들이었지만, 탈의실에 혼자 들어간 적은 없었다. 사람이 좀 많더라도 주말에 삼촌과 함께 가지 않겠냐는 걱정스런 내 물음에, 승오는 혼자서 옷 갈아입는 거쯤이야 쉽게 할 수 있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어느 평일 오후 우리 모자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결제하고 나니, 아들은 남자 탈의실로, 나는 여자 탈의실로 향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직원에게 탈의실 내부를 꼼꼼히 물어본 후, 아들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했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고, 숫자 키에 알맞은 사물함의 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열쇠로 잘 잠그고, 수영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라고... 나 역시 처음 방문하는 수영장이었기에 갈림길 앞에서 걱정이 물밀듯 몰려왔지만, '고작 옷 갈아입고 나와서 다시 만나는 건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아들과 헤어졌다. 


 아들과 헤어져 들어온 여자탈의실 내부는 무척 소란스러웠다. 방학 특강 수영 수업 때문인지 사람이 바글바글 많았다. 막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과 이제 들어가려는 학생들 사이에서 청소 직원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너! 씻었으면 물을 닦고 내려오라고!"


 무척 화가 난 듯 씩씩대기까지 하던 청소 직원은 샤워실 쪽으로 아이들을 쭉쭉 밀고 있었다. 밀리는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 4~6학년 사이로 보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잖아! 야!! 내 말 안 들려?!!"


 가만 보니 샤워실에서 탈의실 쪽으로 오는 길이 무척 좁아서, 혹여나 물기에 미끄러지면 누군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내부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이용자들이 다칠까 걱정하는 마음에 청소 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 모양이다. 심지어 수영장 쪽에서 나는 소음이 탈의실에 가득 차서, 작게 말하면 잘 들리지 않다 보니 그녀는 고함을 지르듯 말하고 있었다.


 직원의 고함소리와 우르르 이동하는 수강생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후다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샤워실에서 몸을 씻은 다음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대하던 얼굴이 없었다.


 남자 탈의실 근처에서 5분 정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오가는 남자 직원을 붙잡고 승오를 찾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알겠다며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 내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감사 인사를 하고 승오 손을 잡는데, 느낌이 뭔가 이상했다.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멍하니 있는 아들의 눈빛에는 총기가 없었다. 불쾌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이게 뭐야, 얘 왜 이래!


 "승오야, 승오야...? 엄마 봐봐."


 잠시 멈칫하던 아이는 이내 나와 눈을 맞춰오고는 곧장 울음을 터트렸다. 흐뭇한 얼굴로 지나가려던 남자 직원도, 아이의 손을 붙잡고 눈높이를 맞춰 앉은 나도 당황했다. 멀찌감치서 지나가던 다른 직원들이 수군대더니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승오야, 엄마한테 말해봐."


 "엄마... 엄마아..."


 엉엉 큰 소리로 울던 아이는 이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 갈래. 우리 그냥 집에 가자 엄마. 너무 무서워..."


 "왜 그러는데, 탈의실에서 넘어졌어?"


 "아니, 아니야..."


 "그럼, 다쳤어? 왜 울어? 왜?"


 "아니야... 어떤 아저씨가 나한테 엄청 화내고 소리 질렀어... 너무 무서웠어 엄마..."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조금 전 여자탈의실에서 고함을 지르던 직원의 모습, 당황하던 아이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여자 탈의실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참 울던 아이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영복 입고... 샤워하려고 했는데... 나보고 수건 어디 있냐고 고함쳤어."


 "수건? 왜?"


 "나도 몰라... 그래서 수건이 어디 있는지 생각했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를 냈어. 엄청 무섭게 소리 질렀어. 당장 수건 가져오라고 했어."


 "하지만 너는 방금 수영장에 왔는데. 수건이 왜 필요하대?"


 "모르겠어. 그냥 계속 화냈어. 그리고 막 나를 밀쳤어. 나는 무서워서 샤워실에 들어가서 구석에 가만히 있었어."


 "승오가 막 씻고 나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몰라... 지나가는 아저씨가, '얘 방금 온 애예요. 수건 필요 없어요.' 그랬는데도 나한테 계속 화를 냈어."


 "그 아저씨는?"


 "몰라, 그 아저씨는 그냥 지나갔어. 나는 샤워실 구석에서 계속 서 있었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너무 무서웠어 엄마..."


 아들은 히끅거리는 숨소리를 참아가며 상황을 알려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금 여자탈의실에서 봤던 장면들이 오버랩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승오에게 소리 질렀을 남자 직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는 무슨 자격으로 애한테 마구 소리를 지르고 함부로 대한 거야!?


 오늘 처음 온 장소라 긴장되었을 아들은, 낯선 남자 어른의 고함에 놀라 샤워실 구석에서 10분 넘게 서 있다가 내 부탁으로 들어간 다른 직원의 손에 이끌려 나왔던 것이다. 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당장 그 직원을 찾아가 따질 요량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애한테 왜 소리를 지르고 밀쳐요, 뭐 그런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엄마..."


 눈을 치켜뜨고 옆에 있던 직원에게 그 문제의 남자를 불러달라고 말하려던 참에, 훌쩍거림이 잦아든 아들이 나를 불렀다.


 "엄마, 근데 생각해보니까 지금은 괜찮은 거 같아. 우리 그냥 수영장에서 놀면 안 될까...?"


 울음기가 많이 가신 아들은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근처에 몰려있던 직원들은 '에고, 아이가 많이 놀랐나 봐요. 직원이 좀 과격하게 말했나 보네...'하고 중얼거리더니 하나둘씩 흩어졌다. 생기가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나는 치솟는 화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했다.


 우리는 분명 여기 놀러 왔다. 아이의 여름방학을 맞아서, 그래, 물놀이를 하고 룰루랄라 돌아갈 예정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화를 참지 못하고, 남자 직원을 불러 다투게 된다면, 물놀이를 한다고 해도 즐겁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하기 싫어져서 곧장 집에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승오에게 손해다. 아이는 처음 만난 웬 남자 직원에게 쫄아붙어서 귀가했다는 기억만을 가지고 수영장을 떠올릴 것이다.


 나 혼자였다면, 그래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분명 문제의 남직원과 한바탕 다툰 뒤 사과를 받아내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끝으로 그 공간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일을 허투루 넘어가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오늘은 아이와 함께 왔다. 나의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엄마랑 놀자. 저쪽으로 가볼까?"


 우리는 정말로 즐겁게 놀았다. 수영 연습도 하고, 챙겨 간 물안경으로 수영장 바닥도 구경해 보고, 잡기 놀이도 하면서. 세 시간이 넘게 지나 우리의 손발 바닥이 쪼글쪼글해지고서야 바깥으로 나왔고, 나는 수건을 주면서 씻지 말고 몸 닦고 옷 갈아입고 바로 나오라고 했다. 탈의실에서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성별이 다른 나로서는 도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번호 키에 맞는 사물함을 찾지 못해 헤매던 아들이 조금 늦게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근데 엄마, 그 아저씨는 나한테만 소리 질렀어. 다른 어른들한테는 좋게 대했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승오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 무서운 아저씨 말야."


 "...모든 어른이 다 어른스러운 건 아니라서 그래. 만약 승오가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었다면, 그 남자는 너에게 소리 지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야. 너가 어리고 약해 보이고 만만하니까 함부로 그런 거야. 그런 건 굉장히 치사한 거고 나쁜 거야."


 "맞아. 너무 무섭고 슬펐어."


 "그래 무서웠지. 승오가 뭔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야. 근데 잘못하지도 않은 애한테 자기가 오해해서 윽박질러놓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올바른 행동이 아니야. 어른으로서 잘못한 게 맞아."


 "응... 이제 두 번 다시 수영장 안 갈거야."


 "그래?"


 "무서웠으니까. 그치만 삼촌이랑 같이 가면 괜찮을 거 같아. 엄마, 다음엔 삼촌이랑 셋이서 같이 가자!"


 "좋아, 그러자."


 아들과 약속한 후 남자친구에게 이 일을 전했고, 굉장히 속상해하던 그는 셋이 함께 수영장에 가자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이후 수영장 관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바닥에 큰 수건을 깔던지, 물기 닦고 나오라는 플래카드를 붙여주길 당부하면서, 두 번 다시는 아이들에게 혼내듯 고함치고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담당자는 전혀 몰랐다면서 연신 사과했고, 나는 그 얘길 아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는 항상 아이에게 이유 없이 타인에게 불친절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나치게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쌀쌀맞게 대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어른들은 어떠한가. 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함부로 대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른들의 고함소리 몇 번에 아이들은 이유도 모르고 쫄아붙어서 발발 떨 수밖에 없다. 힘 약한 아이들이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영화 [스파이더 맨]에서 강함 힘에는 그만큼의 책임감이 따른다는 대사가 나온다. 비단 슈퍼 히어로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힘이 센 어른이라면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어떠한 변명을 붙이건 약자 앞에서 크게 고함치고 마구 밀치는 행위는 상대에게 거대한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나는 수영장 담당 직원과 전화를 끊기 전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 분께 전해주세요. 굳이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어른을 상대로는 하지 않을 무례한 행동을, 어리고 약한 상대에게 함부로 하지는 말라고. 강약약강, 그거 나쁜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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