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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Sep 29. 2022

이혼하고서 누리는 추석의 여유로움


최근 아들,남자친구,나 세 사람은 어떤 모바일 게임을 동시에 시작했다. 종종 하다보니 관심이 생겼고 관련된 단체 카톡방도 가입하게 되었다. 멤버중 99.9%가 남성이었는데 나는 성별을 굳이 알리지 않고 올라오는 채팅글을 읽기만 했다. 그런데 추석을 앞두고 걱정하는 내용의 글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부분 명절때 친구나 친척들을 만나게 되면 술을 많이 먹게 될거고, 바쁘고 피곤하니 게임에 접속할 시간이 없을거라 걱정했다. 단체로 해야 하는 게임 내 미션을 명절 이후로 미루자는 얘기도 나왔다.


[다들 30대신가봐요]


라는 한 사람의 말에, 대부분이 수긍했고, 몇몇은 40대라고 답했다. 몇몇은 와이프에 대해 언급했고, 어떤 이들은 자녀에 대해 말했다. 3,40대 남성들에게 추석이란 이런 느낌인걸까. 물론 일부가 전체를 대변할 수 없기에 결코 모든 남성집단이 같은 모습일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모습들이 매우 낯설고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비교군 때문일거다. 나는 이와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체 카톡방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이름하야 [육아팁 공유] 방이었다.


100% 엄마들로만 이루어진 이 채팅방에선 9월에 접어들기 무섭게 한숨섞인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해엔 시댁에 음식을 안 해가도 되서 신이 난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또 어떤 잔소리를 듣게 될까, 며칠정도 있다 오게 될까, 혹여나 남편과 시댁 일로 인해 또 다시 싸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휩싸였다. 애가 하나뿐인 집은 '둘째 낳아야지', 아들만 있는 집엔 '딸은 하나 있어야지', 딸만 있는 집엔 '그래도 아들이 필요하지', 애가 서넛이면 '돈 많이 들텐데 어쩌려고 그리 많이 낳았니'하는 잔소리까지... 차라리 야근을 한 달 하는게 낫겠다는 분위기다.


한 멤버는 시댁에서 일 그만두고 아이를 낳으라 한다며 한참을 성토했다. 그 열받은 마음이 글자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아이가 태어나면 주변 많은 이들이 아이 아빠에게 축하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넨다.


"돈 열심히 벌어야겠네. 가족들 먹여 살리려면."


누구도 같은 말을 아이 엄마에게 하지 않는다. 직장을 계속 다닐건지, 그만두는게 낫지 않을지 걱정스레 물을 뿐.


현대에 와선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많이 나타났고, 추석때 시댁이나 친정을 아예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혹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집밥이 아닌 맛집에서 어른들을 뵙는 등 방식은 여러갈래로 나뉘었지만 어쨌든 "추석의 모습"이라며 막연하게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잡은 이미지가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 때 기혼이었지만, 현재는 이혼한 비혼주의자이며 남자친구와 함께 초등학생 아들을 양육하는중인 나는 어떨까.


어린 시절 덜덜거리는 자동차 뒷 좌석에서 몸을 배배 꼬며, 옆에 앉은 동생과 서로 자리 넘어오지 말라며 투닥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제 도착해요? 너무 지루하고 답답해요! 이런 불평들은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나보다 더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한 이후 얼굴이 활짝 편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의 안색은 점점 나빠져갔다. 우리 아버지는 첫째인 큰아버지와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고, 모든 가족들에게 오냐오냐 이쁨 받는 막둥이였으니까. 그런 막둥이의 아내라면 응당 예뻐해줘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친척들은 마치 막둥이를 빼앗아 간 악당처럼 우리 어머니를 대했다. 정작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참 잘해주셨는데, 시누이들(나의 고모들)의 괴롭힘이 어지간했다. 어쨌거나 우리 아버지는 둥개둥개를 받으며 형,누나들 가운데서 행복하게 웃었고, 우리 어머니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추석 내내 허리 몇 번 펴지 못했다.


짧았던 나의 결혼 생활 동안 추석은 어땠을까. 전남편은 소문난 효자로, 이에 대해 말해보자면 삼 일 밤낮을 떠들 수 있다. 나도 성격이 보통은 아닌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노인 공경을 마음에 새기며 시어머니를 대했었다. 밀면 밀쳐지는게 아니라 '지금 저 밀치신거에요?'라고 반문하는 며느리었지만, 어쨌거나 내 나름 예의바르게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인간적으로 참 무례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볼 일도 없고, 더군다나 그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고달파질 것은 본인들임이 자명하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당시에도 나름 당당하게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편하기가 결코 지금에 비할 바는 못된다.


지금 우리의 추석은 무척 고요하다.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미술 전시관을 찾거나, 극장 또는 도서관, 뒷 동산, 멀지 않은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 이동이 많은 시기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 성격탓에 멀리 나다니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추석 당일 외엔 내내 우리와 함께 보내는데, 이것도 4년째에 접어드니 슬 적응이 되어간다. 우리는 동네를 산책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긴 휴일을 누린다.


그래, 누린다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 평소엔 일찍 출근하여 느즈막이 퇴근하는 남자친구도, 명절이 되면 내내 우리 집에 와 있기 때문에 부대끼며 함께 있는 시간을 누린다. 미뤄왔던 대청소를 하거나 함께 가보고싶었던 장소에 방문한다. 새로 생긴 키즈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텅 빈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공을 갖고 한참 뜀박질을 하기도 한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저와 온종일 꼭 붙어 놀아주는 엄마와 삼촌 덕분에 더없이 행복해한다. 이혼 초반엔 약간 이웃의 눈치도 보고 그랬는데(저 사람들은 어째서 명절 내내 집에 있는걸까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지금은 모든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추석이 다가오면 심신이 편안해지며 올해는 뭐 하고 놀까 궁리부터 시작한다.


이혼 전이라고 특별히 힘들었던 점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이혼 후에는 비할 바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여자들이 많은 카톡방에서도, 남자들이 많은 카톡방에서도 대화에 껴들지 못하고 배회한다. 왜 둘째 안낳니, 일은 언제 그만둘거니 잔소리 하는 친지도 없고, 술 더먹으라 억지로 부어주는 지인도 없어서.


"엄마, 차례가 뭔지 알아? 그리고 무덤에 가서 뭘 한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아들이 추석에 대해 배운것들을 꺼내놓았다. 가방을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막 친척들이 우르르 모여서 뭘 한다는데? 맛있는거 먹고, 또 뭐였지?"


우리 가족이 누리는 추석과 교과서에서 배우는 추석은 많이 다를것이다. 그리고 내게 재혼 의사가 없는 한은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거다. 친척들한테 둘러싸여 추석을 보내는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없대도 아쉽지는 않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아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고, 세상 모든걸 다 해줄수는 없다는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하면 그걸로 되었다. 올해도 이렇게 추석을 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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