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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Sep 06. 2022

모든 게 느린 남자와 모든 게 급한 여자의 연애


 한동안 나는 남자친구의 정해진 출근 시간이 오전 7시이고, 퇴근 시간이 오후 8시 반인 줄로 알았다. 실은 오전 8시가 출근 시간인데, 그는 6시 50분경 홀로 텅 빈 사무실 문을 열고 불을 켜고서 한 시간가량 혼자 일을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출근을 1시간이나 일찍 하는데, 퇴근은 훨씬 더 늦었다. 수요일을 제외하면 늘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퇴근하곤 했는데, 이미 다른 직장동료들이 5~6시경 퇴근한 이후라고 했다. 그는 이른 아침 사무실 문을 열고, 늦은 밤 홀로 잠그고 나오는 사람이었다.


 왜 굳이 1시간 일찍 출근하여 남들보다 더 늦게 퇴근하느냐고 질문했더니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를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 답이었다. 사서 고생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니, 왜 그러지?


 남자친구는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생각을 조리 있게 잘 전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와의 소통에 애를 먹은 적이 많다. 게다가 자기 일상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일상 이야기는 재미 없을 거라고 한다. 나는 궁금한데?!) 감정적으로 교류만 부드럽게 잘 된다면 굳이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이와 정반대로 나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감정적 교류보다 일상 속 사건 공유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어난 사건의 개요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꽤 집요하게 질문하는 편이다.


 내가 열 가지를 질문하면 그는 대체로 한 두 가지만 대답을 하고, 나머지는 '음...' 이라거나 '글쎄... 모르겠는데...'같은 말로 얼버무리기 일쑤다. 여러 번 같은 걸 물어야 겨우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그에겐 중요하지 않은 문제고, 나에겐 무척 중요한 문제라 이런 성격 차이가 갈등으로 번질 때도 많았다.


 게다가 나는 화가 나면 날수록 말을 속사포처럼 빨리 쏟아내고,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자 애쓰는 데 반해, 상대방은 화가 날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는 편이다. 나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빨리 해결될수록 화가 덜 나는데, 그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을 충분히 가진 뒤에, 며칠이 지나고 나서 천천히 대화하길 바란다. 나는 늘 급하고, 그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답이 돌아온다.


 "그게... 마음이 편해서."


 "그러니까, 고생하는 게 왜 마음이 편하냐는 거지.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하는 이유가 있을거 아냐."


 "글쎄...음, 몰라, 그냥..?"


 "...아오 속 터져!"


 이 남자를 잘 모를 땐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저러나 싶기도 했다. 무슨 질문을 해도 흐지부지 넘기려고만 하고,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꼭 수상한 점을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 그러면, 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이유라도 알려주면 안 돼?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팔자 눈썹으로 반쯤 울먹거리며 말하면 그제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진짜 그냥... 그냥... 혹시라도 지각하면 그게 더 스트레스받으니까..."


 횡설수설 답변을 꺼내놓는 그였다. 대답을 들어도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지각하는 게 스트레스받는다고 1시간이나 일찍 출근해?"


 "어...음...어쩌다 보니...출근길에 사람 많은 것도 싫고..."


 "...싫고? 또?"


 "일찍 가서 혼자 사무실에 조용히 있는 게 마음 편해... 혹시 늦을까 봐 걱정 안 해도 되잖아..."


 "그럼 퇴근은 왜 늦게 하는 거야?"


 "그것도 뭐...어쩌다 보니..."


 "아휴... 또 말 안할 거야?"


 "그냥...아니...뭐, 글쎄..."


 이런식이다.


 그런 그와도 벌써 연애 4년 차,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중이다. 이제는 한 번에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한테 말하기 싫은가? 질문하지 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가 답을 하기 위해 머리 굴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몇 번 같은 질문을 던진 뒤 며칠이 지나서야 그는 완성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 그는 평균보다도 훨씬 느리다.


 그의 입장에선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평균보다도 훨씬 급한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내 속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데, 평균보다 느린 그는 어떨까. 사실 이 질문을 만날 때마다 던지고 있는데 '글쎄...'라는 답변 외에 다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다행스럽게도 만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음...' 이라는 답변보다 '생각해보고 얘기해줄게.'라는 답변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느림보 거북이가 성격 급한 토끼를 만나서 고생이 참 많다.


 나는 이혼 후 확고한 비혼주의자가 되었고, 항상 주위에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남자친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에게 여러 번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었지만, 여전히 '글쎄...'나 '음...'같은 답만 돌아온다. 자기 나름 답을 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는 거겠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엔 딱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고, 내가 결혼은 싫다고 하니 그저 받아들이는 눈치다. '나랑 결혼을 하고 싶은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몇 달이 더 지나야 들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이 확고한데도 자꾸 물어보는 이유는 그에게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일방적으로 한쪽만 희생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데, 우리 관계의 저울은 이미 많이 기울어 있어서. 저녁이 되면 애를 재우고 파김치가 되어 몽롱한 상태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대신해, 더 늦게 퇴근한 남자 친구가 설거지하고 쓰레기통을 비운다. 새벽 두세 시쯤 후다닥 깨보면 집은 깨끗하고, 남자친구는 제집으로 돌아간 뒤다. 이런 생활도 4년쯤 되니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이혼 직후 한동안은 친부에게 학대당한 트라우마로 이상 행동을 하는 아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들의 치료가 끝나갈 때쯤 내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땐 가끔 만나 아이와 놀아주고, 우리 집에 들러 청소를 해놓고 가는 어린 남자애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애는 뭘 물어도 답이 없었고, 나에게 요구하는 바도 없었기에 나는 더 나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아이의 트라우마가 점점 옅어지고, 내 몸도 제법 회복되고 나서야 옆에 있는 웬 남정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이상한 연애를 시작했다. 불타는 사랑보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한 그런 연애. 생활에 여유가 조금 생겼지마는 나는 여전히 남자친구보다는 내 아이와 나 자신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그것은 느릿느릿한 그에게 꼭 맞는 속도였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건데, 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쓸 때 남자친구가 아닌 아들을 떠올린다. 미래를 계획할 때 자연스레 아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이 얘기를 남자친구에게 해 보았다. 여러 번의 질문 끝에, 내가 아이를 우선시 하는 게 당연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의 말과 생각이 느린 것처럼, 내 마음이 느리게 움직이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고. 만일 우리 처지가 바뀌었다면, 난 서운했을 것 같은데, 그는 아닌 모양이다. 나와의 관계에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또 한참이 지나 답을 보내왔다.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거라고. 그게 본인이 원하는 거라고.


 지각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게 싫어서 1시간이나 일찍 출근하는 남자는 자신이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스트레스받기 싫어서 일찍 출근하는 건데, 그게 왜 착한 행동이냐고. 나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가 더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해서, 모든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동할 뿐이라고. 얼핏 맞는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내가 몇 번을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같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편하고 좋다고.


 사족을 덧붙이자면 내 급한 성격 때문에 그를 몇 번 울린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격양된 어느 순간에 "너는 도대체 왜 말을 안 해? 나 따위와는 말도 섞기 싫다 이거야?!"라고 몰아붙였다가 "그, 그게 아니고..."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하였던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말을 아낀 게 아니라, 정말로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그랬다는 걸 이제는 믿는다. 그는 순수하게 정말로 느린 사람이다.


 나와의 관계에서 그가 뭘 원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우리 집에 와서 설거지나 하고, 내가 키우는 동물들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내가 어질러놓은 것들을 치우고, 내 아들과 땀 뻘뻘 흘리며 놀아주는 것 외에 별달리 하는 게 없어 보여서 그렇다. 또는 먹을 것을 사오거나 냉장고 대청소를 하거나 한다. 나는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둔다. 그는 매일 밤 8시 30분 퇴근 후 우리 집으로 곧장 와서 설거지와 청소를 해놓고 자기 집으로 가서 자고, 다음날 새벽같이 기상해서 또 출근한다. 주말은 온종일 우리와 함께 보낸다.


 그가 회사에서 유능한 직원은 아닐지 모르지만,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1시간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홀로 퇴근하는 이를 함부로 자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그가 말주변도 없고, 반응도 느려서 답답할 때가 많지만, 옆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묵묵히 챙겨주는데 사이가 나빠지기도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있고, 이 때문에 예민해지고 화가 쉽게 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나는 연애나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고, 오히려 남자라는 성별에 대한 부담감만이 가득했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휘몰아치는 거친 태풍이 아니라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날의 햇살인 것처럼, 그는 천천히 우리 가족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웃음이 늘었고, 모든 게 편안하게 느껴진다. 남들 앞에서 늘 쓰고 있는 가면과 경계심도 우리끼리 있을 땐 내려놓을 수 있다. 남들은 불안정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한 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막 불타오르진 않는데, 어쨌든 이런 감정도 일종의 사랑이라 봐야 하는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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