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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Sep 05. 2022

주말마다 키즈카페에 가는 미혼 남자


어느 저녁, 세 사람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옹기종기 모여 놀 거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아들과 여름휴가가 시작된 남자 친구, 그리고 마침 일정이 비는 나, 이렇게 셋이었다. 남자 친구의 휴가가 3일밖에 되지 않아서 짧고 즐겁게 놀 수 있을 만한 거리를 고민했다.


아들은 물놀이를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실내 놀이를 선호했으며, 남자 친구는 무조건 우리의 선택에 따르겠다고 했다. 평소에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남자 친구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 날도 똑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 날따라 너무 내 마음대로 정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너는 뭔가 하고 싶은 거 없어? 늘 나랑 승오 하자는 대로만 하고."


걱정 가득한 나의 물음에 남자친구는,


"아닌데? 나 거기 완전 좋아하는데?"


라고 답했다.


"거기? 어디?"


"거기... 너네 간다고 한 거기..."


"무슨 소리야... 아직 어디 갈지 결정 안 했잖아..."


사실 우리가 사귀기 전엔 늘 키카(키즈카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내가 어린 승오를 데리고 키카에서 놀고 있으면 그가 그곳으로 찾아와서 만나는 방식이었다. 자녀가 없는 남자가 홀로 키카를 찾을 일이 뭐가 있었으랴. 주말마다 키즈카페를 방문하는 미혼 남성은 흔치 않다. 키카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던 그는 우리 모자를 따라(?)다니다 근방의 키카란 키카는 몽땅 방문한 남자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우리 키즈카페 갈 건데 같이 갈래?'라고 묻지 못했다. 항상 상대가 먼저 '승오는 지금 뭐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키카에 있다는 답을 들으면 그는 거의 바로 달려왔다. 승오는 삼촌과 둘이서 노는 걸 무척 좋아했고, 그는 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고 오로지 승오와 둘이서 놀았다. 잘 놀고 있는 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곤 했다.


주말의 키카엔 아빠와 함께 놀고있는 다른 아가들이 많았기에, 삼촌 손을 잡아끌며 키카 이곳저곳을 누비는 승오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부자지간으로 보일 만큼 그는 승오를 살뜰히 잘 챙겼다. 늘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혹여나 넘어지거나 어디 부딪힐까 늘 손으로 아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이가 하는 말에 하나하나 반응해주고, 눈 맞춰 대답해주고, 원하는 방식대로 놀아주었다. 그러면 승오는 엄마를 찾지도 않고 즐겁게 지냈다. 나는 얼마든지 키카 구석 테이블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결혼도 안 한 남자가 키카 전문가부터 되다니..."


이런 나의 한탄 섞인 한숨에,


"아마 승오보다 내가 더 키카를 좋아할걸?"


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였다.


돌이켜보면 전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것도 키즈카페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내가 몸살에 앓아누웠던 어느 주말, 어쩔 수 없이 전 남편과 아이 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가 아이를 키즈카페에 데리고 갔던 것이다. 키카에서 떼를 쓰고 말 안 듣는 세 살짜리에게 대단히 화가 난 그 남자는 곧장 아이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아이를 구타했다. 그날의 사건 이후로 폭력의 수위는 점차 심해졌고, 폭언도 날로 강도를 더해갔다. 아마 키카 사건이 아니었어도 그 폭탄 같은 남자의 성질머리는 언젠가 터졌겠지만, 어쨌든 예전의 나에게 키카는 나쁜 기억이 있는 공간이었다.


남자 친구는 친부보다도 승오를 더 잘 보살폈다. 더 상냥했고, 늘 배려했으며, 아이에게 전부 맞춰주었다.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고, 혼내지도 않았다. 단지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줄 뿐. 그 둘은 가끔 나보다도 더 사이가 좋았다. 나는 오히려 그 상황이 기꺼웠다. 그 당시엔 이혼의 스트레스로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여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녔고, 정신과 약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남자 친구의 노력 덕분에 키즈카페가 점점 좋아졌고, 나에게도 승오에게도 즐거운 기억만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에게는 어땠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매우 잘된 일이었다. 이혼 이후 "내 인생에 남자는 승오 하나면 족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내가 이렇게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의 수많은 희생 덕분이었을 거다.


어쨌든 아들과 남자친구, 그리고 나, 세 사람은 계속해서 휴가 계획을 세웠다. 하루는 야외 수영장에 가서 승오가 원하는 물놀이를 실컷 하기로 했고, 다음 날은 보드게임방에 가서 내가 원하는 실내 놀이를 하기로 했다. 나는 덥고 습한 건 질색이라 야외 수영장도 가기 싫었지만, 승오가 너무 원했기에 하루만 허락하기로 했다. 이제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남자친구는 키즈카페에 가자고 주장했다. ㅇㅇ동에 있는 키카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꼭 가야 한단다. 그가 가자고 하는 곳엔 무료 안마의자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는데, 그는 나를 그곳에 앉혀두고 승오와 둘이 놀다 오는 걸 꼭 하고 싶단다.


"왜 그래~ 네 휴가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골라야지."


"난 키즈카페를 엄청 좋아하는데! 왜 못가게 해...?"


"그러니까, 키카를 왜 좋아하냐고."


"너가 키카 안마의자에 누워서 푹 쉬면, 내가 기분이 좋아."


"엥..."


"승오랑 막 뛰어놀고 집에 와서 애가 빨리 자면, 니가 편하니까, 또 내가 기분이 좋아."


"엥... 뭐야."


마지막엔 결국 나도 승오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삼촌은 맨날 엄마 걱정만 해!"


승오의 말대로다. 그는 내가 더 많이 쉬길 바란다. 그래서 아이 케어도 본인이 다 하고, 집 청소나 설거지도 가능하면 다 하려고 한다. 그동안 내가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고 쉬게 한다. 그게 무척 고맙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염치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무척 벅차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이 케어에 시간을 다 써서 늘 피곤에 쩔어있고, 번 돈은 족족 아이 밑으로 들어간다. 주말이나 쉬는 날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머릿속은 온통 아이에 관한것들로 가득이다.


처음엔 한쪽만 희생하는 불균형이 못내 불편해서 아예 관계를 단절시켜보기도 했다.


"너한테는 첫 연예인 건데, 육아부터 시작하는 건 좀 너무한 거 같아서."


그런 말로 이별을 고했었다. 사실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 사이라서 헤어지기가 좀 애매했는데, 어쨌든 나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선을 그었다. 아이가 자꾸 삼촌에게 익숙해지는 것도 걱정이긴 했다. 저렇게 잘 따르는데, 나중에 혹시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힘들어하진 않을까? 친부와도 데면데면했던 아이라서 잘 챙겨주는 삼촌에게 더 푹 빠지게 된 걸지도 몰랐다. 아이가 느껴본 적 없는 성인 남성의 다정함이었을 테니. 그렇게 애착을 가지게 된 뒤에 또다시 잃게 될까 봐, 나는 미리 선을 그은 거다.


이후 그는 아주 느리게, 우리에게 다시금 연락을 해왔고, 내가 아플 때마다 승오를 케어하거나 죽을 사다 주는 등 꾸준히 도움을 줬다. 이성적인 스킨십 시도 같은 게 있었다면 불쾌했을 텐데 그런 것도 일절 없이 와서 먹을 거 사다 놓고, 애랑 좀 놀아주다가 설거지하고 돌아가는 식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그는 똑같았다. 거리를 지키면서 나를 꾸준히 도왔다.


결국 우리는 다시 사귀는 거 비슷한 사이가 되었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먼저 선을 넘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무진 애를 썼을 뿐이다. 그때 왜 그랬냐는 나의 물음에,


"너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라고 답했다. 매일 회사에서 늦게까지 야근하고, 별거 중인 부모님 따로 챙기기까지 본인이 제일 바쁠 텐데, 나를 걱정하다니... 그러나 그는 내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너가 기분이 좋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 그래서 회사에서 일도 잘하게 되고. 그러니까 나는 나 좋자고 이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나 승오랑 노는거 되게 재밌어. 내가 승오 좋아서 같이 노는거야. 자꾸 미안하다고 하지 마."


나는 여전히 결혼 생각이 전혀 없고, 한평생 애나 잘 키우다가 나 하고 싶은 거 조금 하며 놀다 혼자 죽을 생각이다. 그런 나에게 남자 친구가 뭔가 요구하는 게 있었다면 우리는 이런 깊은 관계가 되지 못했을 거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건 내가 힘들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한다고.


남자 잘못 만나 망한 여자는 있어도, 남자를 안 만나서 망한 여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내 경험을 되짚어봤을때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혼 후 비혼비연애주의자로 살려고 했었다. 괜히 이상한 놈 만나서 또다시 고생하고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육아하는 비혼주의자의 연애라는 건 이 정도 되는 상대를 만났을 때라야 가능한가 보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1순위는 육아라서, 연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남자 친구에게 가장 중요한 1순위는 그런 나의 행복이라서. 내가 육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항상 맘써주는 남자 친구에게 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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