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정리하다 발견한 글인데
재미나면서 한편으로 오글거리기도 하고..
한참 낄낄 웃다가 브런치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여행 다녀온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에 쓴 글인데.
티벳 임시정부가 있었던 산골짝에 놀러갔다가
카페 JJI에서 직메랑 친해져서 차 마시며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끄적였음.
(글속에 나오는 '진저'라는 강아지는 실제로 JJI 커피숍 앞에서 마주쳐서 직메랑,나랑 한바탕 신나게 놀았던 사이다.)
러브스토리 치고 꽤 허무한거 같고
다시 봐도 웃음이 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이런걸까?
장황하기도 해라...
어쨌든 그때 설산을 바라보며 마셨던 '진저-피치-티'가 그리워지는 오후이다.
.........
2012년 1월 20일에 썼던 글.
Sweet Ginger Peach Tea
‘진저-피치’ 사이에 틈이 있다.
나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진저-진저 사이의 틈, 피치-피치사이의 틈, 그리고 진저-피치 사이의 틈에 대해.
뜨거운 물이 부어지고 풀어지는 진저와 피치. 그들은 원래 중국의 어느깊은 산 속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피치는 남자 사람이었다. 진저는 한 송이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피치는 집 앞 뜰에서 우연히 진저를 발견한다.그리고 그에게 ‘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생-진저’는 피치가 이름을 붙여 준 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생-진저는 피치에 의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달아갔다. 피치는 매일같이생-진저에게 다가가 사랑의 단어들을 속삭였다. 생-진저는 조금씩 깨어났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속삭임. 시간이 차츰 지날수록 그는 식물로써의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 듯 멍했던 그의 인식에 새로운 균열이 생긴 것이다. 생-진저는 몇몇 나비와벌들, 혹은 진드기들에게 그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나비는 아예 질문 자체를 듣지 못하고 날아가 버리곤 했다. 몇몇 벌들은 다른벌들과 상의 후 답을 해주겠다 약속했지만 그 날 이후로 그 벌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생-진저 주변의 다른 꽃들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일었다. 식물이라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내면에 어떤 갈라짐이 생겼다. 틈은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게도 행복하게도 했다. 어떤 이들은 생-진저에게고마워하는 반면, 생-진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아무튼 그는 이곳에서 별난 존재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우스울 만큼 허무했다. 피치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꽃-생-진저를 소개시키기 위해 산을 오른 그날의 일이었다. 생-진저는 그 전날 피치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에 조금 들떠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벌이 찾아왔다. 다른 벌들과 함께 존재에 대해 토론 해 보겠다고 했던 그였다. 벌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로 생-진저를 불렀다. 생!생! 이봐, 내 이름을 만들었어! 들어봐! 내 이름은.. 내 존재는..! 그는 환희에 차서 외쳤다.
피치의 연인은 이 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쁨과 환희에 차서큰소리로 윙윙거리며 미친 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벌은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벌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피치가 가만히 있는게 나을거라고 외치는 충고도 듣지 못한 채. 그리하여 가여운 생-진저는 피치의 연인을 소개받지도, 벌의 이름을 듣지도 못한 채밟혀 죽어버렸다. 피치의 연인은 몇 번이고 생-진저를 짓밟았다. 나중에 피치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져있었다. 생-진저는 죽어가며 강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조금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흔히 삶의 마지막에서 느낀 강한 소망은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리하여 생-진저는 인도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덩치 큰 잡종개로 태어나게 된다. 그곳은 티벳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어서 진저는티벳인들과 지내게 된다. 어느 통찰력있는 티벳 승려가 그의 이름이 ‘진저’임을 알아차린다. 세상 모든곳이 그의 집이고 모두가 그의 가족이었다.‘생’으로 있을때보다 그는 더욱 자유로웠다. 물론 흘러다니는 삶 만큼이나 외롭기도 했다. 그는 각각의 삶에 따른 장단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진저는가끔 마을 개들을 모아 개들의 자아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갖곤 했다. 토론은 그가 식물일 때 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개들이 눈을 반짝이며 토론에 참가했다. 가끔 지나치게 흥분한 몇몇 개들이 크게 짖어대면 까만 얼굴의 티벳탄들과 휴가차 놀러 온 부유한 인도인들이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지만.. 아무튼 개들의 대화법은 식물들의 대화법과는 달랐다. 그들은 보다 명확하게 스스로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진저는 어느 날 한 여행자와 만났다. 그가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자주가는 JJI라는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식당 주인의 아들 직메가 진저를 그녀에게 소개 해 주었다. 진저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피치의 연인이었고, 생-진저로써의 삶을 마감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녀 탓으로 진저는 피치를 떠나게 되었지만 개로써의 삶을 부여받았기에 오히려고맙기도 했다. 진저는 있는 힘껏 그녀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직메는 당황하며 얘가 원래 여자를 이렇게 좋아했나.. 하고 중얼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진저를 알아보지 못했다. 진저는 그녀가 그 동네를 떠나는 그날까지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언젠가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진저는 개의 삶을 사는 동안 벌도피치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더 많은 경험과 이야기들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저 내부의 틈은 점점 더 벌려져갔다.흔들림은 삶의 증거인 동시에 고통과 희열이었다. 진저가 행복하기만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살아있는 존재로써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진저도언젠가 그곳을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진저는 시장에서 과속하여 달리던 한 인도인 부자의 차에 치여 죽었다.죽음에의 고통은 식물일때 보다 더 심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부의 분열 때문이었을까.. 진저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 그의 이름이 진저인것을 알아주었던티벳 승려가 달려왔다. 그는 진저를 끌어안았다. 그는 울고있지도 웃고있지도 않았다. 그저 따스한 눈길로 진저를 바라보며 기도문을 외워주었을 따름이다.진저는 다행히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티벳 승려가 피치였음을 깨달았다. 이리도 가까운 곳에 피치가 있었던 것이다! 진저는 기쁨속에서 죽어갔다.정신이 점점 멍해지며 오랜 잠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진저의 육신이 마침내 완전하게 죽었다.
진저는 육신을 벗어난 상태가 되어 한동안 공간속에서 떠돌았다. 가끔도시의 가로수에 달라붙은 매미로 태어나거나, 새가 되어 끝도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하는 삶을 살기도 했다…. 어느 날 알래스카에서 펭귄으로의삶을 살던 진저는 꽃으로 있을때 만났던 그 벌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펭귄-진저가 품던 알에서 깬 새끼 펭귄이 진저를 알아보았다. “내가 그 벌이야!”둘은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생을 거치면서 둘은 만나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랬고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벌-새끼펭귄은 스스로에게‘깃’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벌-새끼펭귄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깃털이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둘은 날이 새도록 이름과 존재에 대해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다음날 진저-펭귄이 죽었다. 며칠 더 지나 깃-벌-새끼펭귄도 죽었다.그 이후 둘은 다른 존재로 태어났지만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진저는 몇 번의 생을 거친 끝에 사막에서 살아가는 집시부족의 아이로 태어나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난 진저는 보다 명확하게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이름이 ‘진저’임을 인간 생에서의부모에게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피치를 만나게 된다. 피치는 몇 번의 생을 구도자로써 살았다. 둘이 만난 그때에도 피치는 구도자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진저와 피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막의 밤하늘을 보며 존재와 이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둘은 분명 사랑을 했다.손을 잡지 않아도 함께 있지 않아도 서로를 느낄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써의 삶은 다른 존재로써의 삶보다 더 큰 균열이 있었다. 내부의 균열은 두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내 육체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만난 진저와 피치는또다시 육체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들에겐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삶에 대한 자그마한 집착이 그들을 진저와 피치로 만들었다.
나는 카페에서 Sweet Ginger Peach Tea를 마시며 진저와피치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뜨거운 물에 의해 하나로 섞인다. 어쩌면 내가 아주 먼 과거에 피치의 그 연인이 아니었나생각 해 본다. 그들은 차로 다시 태어나 내게 온기를 전해주고 또다시 사라져간다. 그들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수도 있고, 또다시 찻잎으로 태어날지도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이름이 진저나 피치가 아닐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들이 전해준 온기를 느끼며, 어쩌면 그들이 저 우주 가운데 또다른 별에서 태어나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해보았다. 기실 이 생각을 내가 한 것인지 그들이 내게 전해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