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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배언니 Mar 04. 2024

스페인여행의 백미-
바르셀로나(16)

바르셀로나의 핵심은 역시 가우디투어다

리스보아에서 다소 심심한 일정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비행시간 1 시반 30분. 매우 가깝다.

그런데도 비행기티켓이 서울-제주 간의 반도 안되다니.  다시 한번 우리나라 물가와 비교해 본다.


바르셀로나에 들어서자마자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 광화문에 들어선 기분이다. 남루한 리스보아 건물을 보다 여기는 일반 건물이 기본적으로 화려하다. 물론 파리, 이태리보다는 덜 하겠지만.


이곳은 가우디 건축물을 빼놓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곳이다. 20여 년 전 출장 겸 잠깐 관광한 기억이 아득하다.

역시 유튜브 '리얼 스페인 '을 보고 가우디에 대한 신상털이에 들어간다. 그의 삶 전체를 흩어본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해 평생 약간 다리를 절게된 일,  그래서 휴양이 필요해 시골생활을 하며 자연과 교감했던 것,  이것이 가우디가 자연스럽게 자연물(나무, 나뭇잎, 열매, 동물, 곤충 등)을 모티브로 했던 계기가 되었다는 해설.


개성이 강하고 타협을 몰라 교수들 눈밖에 나서 유급하고 겨우 졸업한 학창 시절 이야기, 사랑하는 가족들과 파트너 건축가의 연이은 죽음, 2명의 여성에 대한 프러포즈와 실패, 깊은 외로움, 무한신뢰했던 자금줄 구엘 씨의 죽음, 건축하다 맘에 안 들면 싹 부수고 다시 시작하는 질리도록  철저한 완벽함, 자금여력에 구애받지 않은 건축스타일, 이런 돈개념 없음으로  말년까지 궁핍한 생활, 까사 밀라의 밀라씨와의 법정소송, 그리고 일이 삶의 전부였던 그의 말년,  한마디로 워라밸 꽝! 


그래서인지 갈수록 종교에 깊이 귀의한 가우디.  

말년에는 성당건축에 올인하며 성당 내 한켠에서 먹고 자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의 광기,  새벽미사를 보고 나오며 당한 전철 교통사고, 그렇게 유명했지만 그의 남루한 색에 신속한 병원행이 늦어지고 몇 번의 승차거부 끝에 병원에 옮겨졌으나 병원조차 노숙자로 오인하여 하루를 방치, 너무 늦은 처치에 죽음을 맞이한 그.


그는 일부러 치료를 거부했단다. 목숨을 두고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따지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까? 사실이라면 가우디의 위대함을 예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모두 인정.


4박을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 그가 다치고 실려간 병원과 마주한 호텔이다.  그것도 그의 스승이라는, 혹은 경쟁자라는 '루이스 도미니크 이 몬타네르'가 지은 멋진 병원ㅡ상 파우ㅡ이다. 의도치 않았는데 이런 우연이. 가우디를 더 가깝게 느끼는 듯하다. 피를 흘리며 남루한 모습으로 실려 온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도미니크는 여기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에 버금가는 유명한 건축가이다. 택시 운전사도 그 점을 강조한다. 가우디만 유명한 게 아니라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 병원과 카탈루냐 음악당이다.  둘 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우디를 떠올리니 순간 내가 추앙하는 고흐의 삶이 중첩된다. 귀족들의 초상화나 풍경화보다 들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그린 그. 고된 일을 마치고 감자요리를 앞에 두고 퀭한 눈들로 식사를 하는 어두운 서민들의 그림.


그가 자신의 자화상과 낡은 신발, 소박하고 썰렁한 아를의 하숙방,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해바라기와 아이리스를 즐겨 그린 것도 가난이 배경 아니었을까?  모델을 구하기는 커녕 물감 구하기도 어려웠던 고흐.


나의 턱없는 과대해석이 또 고개를 든다.  가우디와 고흐는 모두 미혼이었고 연인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며 빈곤했고(가우디는 30세 이전에 유명해서 좀 생활이 나았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풍족함을 누리지는 못한 듯 ) 그리고 한 곳에 모든 것을 광적으로 쏟아부었던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이 떠난 후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들로 엄청난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어라! 굳이 맞춰보니 두 사람이 일 년 차이로 태어났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일세.


휴! 살아 생전 엄청난 돈과 명예를 맘껏 누리고 다수의 여자를 좌지우지 한  피카소와 비교된다.  여기서 피카소의 풀네임을 살펴보자.  자! 시작한다.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폴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로 스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피카소"  이게 뭔 일? 스페인은 모든 조상의 성을 다 붙이는 게 문화특징이란다. 

우리네 옛날 코미디의 긴 이름이 생각나다. "배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석 ~~"


이곳이 피카소가 활동하던 무대이니 다른 선입견을 접어두고 보른지구의 피카소 미술관을 갔다.

마침 생전에 막역한 사이였던 호안 미로와 공동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둘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니 초기까지는 중첩이 되는 듯하다. 어느 순간 서로의 색깔이 확연히 갈라진다.


미로는 점차 형태에 미련을 버린듯하고, 피카소는 그래도 형태의 실마리는 붙들고 있는 것 같다. 비록 모양이 왜곡되거나 위치가 심하게 비틀어지긴 했어도.


피카소전용 미술관인 만큼 그의 초기 스케치와 작품들이 있었다. 아니 피카소도 이런 그림을?

멀쩡한 초상화와 정물화, 풍경화말이다. 천재라고 불렸던 어릴 때 드로잉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가 특별히 기가 막히게 잘 그린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다른 화가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그가 계속 사실화, 구상화를 그렸다면  이렇게까지 위대한 명성을 남겼을까? 아님!  1920년대 프랑스 체류 시의 아방가르드의 물결에  큰 충격을 받고 화풍이 변했단다. 그 이후 추상화, 입체파등 현대미술의 날개를 활짝 편 것이라는데.  여하튼 큰 도전을 한 것은 아무나 못하는 것이지. 인정한다. 


아쉽게도 그렇게 변한 이후의 그림들,  우리가 피카소로 알고 있는 그 특유의 작품들은 여긴 없다. 뉴욕이나 파리, 런던에 있단다. 


천진스러운 후안 미로의 미술관도 몬주익 근처에 있으니 가보려 하고, 달리미술관은 좀 떨어진 곳에 있어 못 가볼 것 같다.


하튼 내일부터는 가우디 투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성되는 2026년에는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릴 것 같단다.

그전에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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