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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r 03. 2022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아집(我執)

사람들이 쓸데없이 자존심을 내세울 때는 대부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가 든하다고 하거나 아니면 정말 별 볼 일 없는 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태껏 누구도 그 사람의 부족함꼭 집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러려고 작정했던 거였든 운이 나빴던 거였든 남편에겐 두 가지의 경우가 모두 해당되었다.

첫 번째의 경우엔 부모님이 그렇게 만드셨고 두 번째의 경우엔 과적으로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5살이나 많은 남편이 그렇게 오랜 시간 어리석게 동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연애할 때까지만 해도 내 말이 곧 법인 양 사소한 다툼 한번 없이 뜻을 맞춰 주기도 했거니와 욱하는 불같은 성질을 가지신 아버지와는 정말 다르게 부드럽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도 내 환심을 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 반대하셨던 우리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아 헤어짐을 얘기했던 내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ㅇㅇ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라고 말하는 남편의 모습은 나를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든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밝히고 다녀 오히려 그 팔불출 같은 모습을 자제시켜야만 했었다. 

하지만 26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오며 남편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순전히 허세뿐이란 걸 온몸으로 증명해 었다.


가족이 함께 살아가며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들이 부족한 것을 '자신이 막내였기 때문에 사랑만 받고 자라느라 대로 배우지 , 부모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자신이 해내지 못하는 '이라는 핑계를 대며 오히려 시부모님을 싸잡아 욕먹게 만들기 일쑤였고 진정성이 떨어지는 입에 발린 상황 모면 하기식의 사과로 오히려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핑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졸렬한 남의 탓일 뿐이었다.


나 역시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이런저런 여러 가지의 고비를 겪으면서도 내가 남편을 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비록 부족한 부부의 모습일 지라도 나름대로 딸에게 노력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살 사고가(19.02.13) 있고 난 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인 충격과 몸 나타나는 고통, 그리고 통증들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체력이 무너지는 징후가 여러 차례 나타나 큰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였다.

사실 방송에 나오고 브런치에도 열심히 글을 쓰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기 보단 견뎌내고 있는 날이 훨씬 많던 날들 중에 코로나19 터지고 심해지기 시작했다.

두 번의 코로나 백신 후유증으로 심한 대장염을 앓게 되어 낮에는 동네에 있는 병원으로 수액을 맞으러 다니고 밤에는 통증을 이기지 못해 몇 차례 응급실을 찾게 되는 일이 생겼다.

MS(다발성 경화증) 발병 이후 눈으로 재발이 여러 번 생겼던 딸아이는 재발했던 눈 쪽의 시야 흐림과 빛 번짐이 심해 밤 운전이 어려워 남편과 응급실을 동행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나 혼자서 택시를 이용해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두 달 가까이 심한 설사를 했던 몸은 혼자서는 제대로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다. 게다가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서지 못할 만큼 (배와 옆구리, 등까지...) 심한 통증 정신을 쑥 빼놓고 있었다.



내가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을 앓게 된 지 이제 9년 차가 되었다. 연수가 오래된 다른 병들이 더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19가지나 되는 중증의 희귀 난치나 난치성에 가까워져 버린 두통이나 섬유 근육통, 독한 약과 불규칙한 식사로 생기게 된 위염, 역류성 식도염... 그리고 우울증, 해리성 기억상실, 인격 상실, 불안 장애, 공황장애.... 자율신경 실조증, 목디스크, 척추관 협착증, 베체트, 중성지방, 고지혈, 베체트 장염, 뇌동맥류, 부정맥까지 내가 가진 병의 진행 상태나 심지어 앓고 있는 병의 종류, 그리고 응급실이나 병원 방문 시에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해 남편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이 날, 대장염으로 고통스러워 응급실을 찾았던 이 밤, 남편의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26년간 싸우고 풀어주고 참고 양보해주고 다시 다투고 배려해주고 상처받고 눈감아주고 죽을 듯 미워하다 연민에 빠지는 지긋지긋한 내 결혼 생활에 끝을 낼 수 있는 별것 아닌 정말 사소한 일이 생겼다. 그 사소한 일을 통해 매번 겪으며 알고 있었던 일을 뼈에 새기게 되었다. 남편은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을 시작으로 여태껏 견디며 살아내느라 애쓰던 모든 일의 끝을 알리는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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