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건 너무나 쉽다. 우리가 불타는 다리를 상상할 수 있다면.
소설가가 되려면 인간이 먼저 되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좀처럼 감당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말이다.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는 원양어선을 탄다던가, 라캉이나 데리다를 공부한다던가 하는 식을 거쳐야 소설가가 비로소 된다는 주변의 이야기들을 넋두리로 풀어낸다. 김연수 작가는 그런 무지막지한 것들보다는 '불타는 다리'를 이야기한다.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써야 한다. 소설을 쓰려면 '불타는 다리'를 상상해라.'
'불타는 다리'가 뭔데? 책을 미리 읽은 내가 작가의 말을 빌려 감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나무다리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위를 지나고 있는 인물은 어떨까? 얼른 무엇이든 행동하지 않을까? 불을 끄든, 다리를 빠르게 건너든, 체념하고 추락을 맞이하든. 이야기 작법에서는 결말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결정적인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른다. 보통 이야기에는 2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어서 대부분 3막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1막의 끝에는 대개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있다. 그걸 다른 말로 '불타는 다리'라고 한다.
생각하게 만드는 책. 쓰는 데 힘이 되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많이 인용할 것 같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 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책 전반적으로 김연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일단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이야기인 듯했다. '불타는 다리'를 상상하며 일단 쓰고 보는 사람. 인물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도, 이야기가 잘 이어지든 뭉그러지든, 개연성이 조금은 부족해도 일단은 하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내는 사람. 그리고 그걸 다시 다듬으며 수십, 수백 번의 퇴고를 거치는 사람. 그게 소설가라는 것.
나중에 다시 이 대목을 복기하다 보니 이야기 밖의 소설가의 입장보다 그 이야기 속의 인물 쪽에 더 눈길이 간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 주인공은 그 사건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된다. 왠지 모르게 이 말에 멋을 느낀다.
요즘 알고리즘에 떠올라서 종종 보게 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등단 시인이 래퍼들의 가사를 읽고 느끼는 소회를 담담하게 풀어내 주는 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다. 시인답게 주옥같은 말들을 많이 한다. 최근에 영상을 보면서 메모에 남겨둔 말이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런 말이었다.
예술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불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내 세계가 아닌 거 같다고 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게 되고, 그 균열의 틈새로 드러나는 진실을 찾으려고 할 때 불화가 생긴다.
내가 알던 세상과의 불화가 나타날 때, 나는 그 경험 이전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균열의 틈새로 서로 다른 세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나라는 인물도 그 틈새를 본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달라진다. 이게 나쁘게 말해서 균열이고 불화이지, 그냥 세계가 그럴 뿐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그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겪고 나면 그때 이전의 사람과 판이하게 다른 내가 되어 있다는 걸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걸 느낀 우리는 이미 불타는 다리를 허겁지겁 건너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불타는 다리는 좀 어감이 안 좋긴 하다(ㅎㅎ). 어쨌든. 그 한 포인트의 순간. 그걸 겪고 나면 우리는 그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순간은 항상 거대하다.
미병(未病)
그 한 포인트의 순간. 그게 우리 몸에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정신과적으로는 당연히 있을 거고. 감정과 의식 쪽 말고도 physiology나 biomechanics의 측면에서도 그런 순간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그 순간들이 모이다가 역치를 넘어가는 그 어느 때. 다리에 불이 붙어버리게 되는 그 한 포인트의 순간이 있을 거다.
불이 붙게 되는 그때까지도, 우리가 내달리고 있을 때는 미처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앞만 보고 가기 바쁘기에, 누군가 나를 뒤쫓아와서 내가 걸어온 다리에 불을 놓는 건 생각지도 못하는 거다. 그러다가 불이 붙는 순간! 매캐한 연기가 나고, 뒤에서 일렁이는 열기가 느껴지며, 딛고 있는 다리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불이 붙었음을 알아챈다.
이 과정을 보고 있자니 옛사람들이 건강과 미병, 그리고 질병이라는 세 단계로 이야기한 것이 떠오른다. 건강한 상태가 있으면 그에 반한 질병의 상태가 있는 거고, 그 사이에 애매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 그 사이의 회색지대를 아직 병이 되지 않은 상태, 미병(未病)이라고 하였다. 아건강(亞健康), 반건강(半健康), Sub-health. 뭐,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개념이다. 병리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증상들의 합(合)으로 이해되는 syndrome 류의 질병들도 넓게 보면 미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불타는 다리를 건너지 않기 위하여
실제로도 임상에서 질병으로 진단하기엔 애매한 borderline의 환자들을 보게 되는 선생님들이 많다고 본다. 1차 의료기관이면서, 4차 의료기관이라고 불리는(... 우리들끼리 하는 농담이다) 한의진료 현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고민이 생긴다. 보수적인 견지로 개입이 필요할 때를 지켜보면서 follow-up 만 잡을지,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미연의 사태를 방지할지.
聖人不治已病 治未病
뛰어난 의사는 병이 걸린 후에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미병(未病)을 치료한다.
옛 문헌에서는 미병 상태에서부터 intervention이 필요하다는 말을 건네 온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불을 붙이러 오는 도둑놈의 인기척을 미리 알아채야 하지 않을까. 도둑놈이 아니라 방화범이라고 해야 하나(ㅎㅎ). 불이 붙은 뒤, 내가 겪는 세계가 변하고, 일련의 연쇄 반응들이 일어나고 나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 한 포인트의 순간에 다다르기 전에, 기민하게 살펴서 질병의 움직임을 눈치채야 한다.
비단 의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정성스레 살펴보아야 한다. 잠을 잘 자는지, 소화는 잘 되는지, 마음은 평온한지, 피부가 건조하진 않는지, 안색은 괜찮은지, 혈압은 괜찮은지, 뭐 살펴볼 것들을 따지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좀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지만 여기서는 글을 줄이고...) 옛날과 다르게 요즘은 우리 몸의 신호들을 반영하는 많은 검사 지표들이 있어서 더욱 폭넓게 살펴볼 수도 있다. 물론 이 영역까지 알면 좋지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나, 건강염려증 같은 걸 생각해본다면... 그냥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낫겠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눈길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미병의 상태에서 불타는 다리를 건너지 말도록. 혹은, 우리가 걷고 있는 다리에 스스로 불을 붙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하루를 되돌아보며 오늘 나의 몸이 보내는 신호는 없었는지, 나 스스로 불쏘시개를 만들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인용 1.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95쪽.
인용 2.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91쪽.
인용 3. 유튜브 '시켜서하는tv' https://youtu.be/xcoL0rY3sKA
인용 4. 《黃帝內經》 (素問卷一) 四氣調神大論
표지 사진. Dewey Bridge Fire, Skez at English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