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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두울 Oct 30. 2021

<종의 기원>

정유정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악'이 생겨났고, 카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다. 이후 인간은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며 생존해왔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소설가 정유정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주제로 책 <종의 기원>을 썼다고 한다. 즉, 이 소설은 소설가 자신의, 아니 우리 모두의 내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종은 ‘악’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악인만이 (번식을 통해) 인간 종(種)의 ‘기원’이 될 수 있었고, 이 소설의 끝에서도 역시나 악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악’이란 본성은 우리 종의 기원이었다. 반면, 작품 내적인 관점에서 제목 <종의 기원>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서는 종탑(鐘塔)에서 나는 종소리에 의해 처음 살인의 충동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는데, ‘종’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사용해 주인공의 ‘악의 자아’의 첫 발현을 설명한 것은 제목이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되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미묘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서술하는 방식 등은 이 소설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인 작품인지를 말해주었다. 소설은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일인칭으로 쓰였는데, 살인자로서의 자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소설의 전반부를 읽을 때는 뿌연 안갯속에서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면, 여러 계기들을 통해 기억의 안개가 걷힌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소설의 주제의식도, 서술의 방향성도 명확해졌다. 또, 아들의 잠재적 위험성을 인지한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 및 명칭이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이나, '악'을 서술하기 위해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선'의 존재감, 혹시나 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비웃듯 클리셰를 무참히 파괴하는 결말까지, 소설 한 권에 들어간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느껴졌다.


 소설은 주인공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천주교에서의 세례는 성악설에 따라 악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쩌면 가장 선해야 하는, 선할 수밖에 없는 세례의 장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독자는 ‘악’의 도래를 느낀다. 이를 시작으로 소설은 선과의 대비를 통해 악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피정소에 기도하러 갔다고 둘러대는 부분에서는 악행을 숨기기 위해 종교적 선을 이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며, 규칙을 파괴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주인공이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는 법조인을 양성하는 로스쿨에 합격했다는 점은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살인자는 태어나는가, 길러지는가? 본능적 악은 교화가 가능한가?


 나는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데에는 무조건 사회의 책임이 부분적으로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개인마다 유전적, 성격적 다양성은 분명히 있겠지만, 학교, 가정과 같은 사회화 기관에서 올바른 교육을 통해 ‘악’의 발현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고, 우리 아이도 달라질 수 있듯이, 100% 순수 악 덩어리(?)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각자에게 부여된 ‘악’의 수치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점화되기 위해서는 불씨가 필요하다. 주인공 때문에 남편과 아들이 죽었다고 믿는 엄마의 프레임,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는 정신분석학적 결과를 믿는 이모의 프레임, 그러한 프레임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불안과 의심의 시선이 살인의 불씨가 되지는 않았을까?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하던 수영을 못하게 통제하고, 약물을 통해 본능을 화학적으로 억제한 것이 더 큰 폭발의 방아쇠가 되지는 않았을까? 주인공을 자유롭게 해 준 유일한 친구인 ‘해진’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교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과 의문이 들었지만, 명확한 답은 낼 수 없었다. 소설에서 정답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같이 책을 읽은 친구들의 생각 또한 저마다 다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 더 따뜻하고 희망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고 싶다. 작가의 서술 방식을 따라가면, 주인공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여러 복잡한 감정이 생긴다. 그중에는 연민과 애정도 있다. 작가가 드러내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애정의 시선을 희망의 불씨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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