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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두울 Dec 08. 2021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누구나 가슴속에 꿈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의 벽에 부딪혀, 혹은 그것을 허황된 꿈이라 치부하고 현생의 삶을 살아간다. <달과 6펜스>는 현실, 속세를 상징하는 ‘6펜스’의 세계에서 벗어나 꿈과 이상향을 상징하는 ‘달’의 세계로 나아가는 한 남자를 그린 소설이다.


 증권회사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받고, 재력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자신과 비슷한 사회적 위치의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는 전형적인 유럽 상류 사회의 일원이었던 스트릭랜드는 불현듯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아내와 아이, 그리고 기존의 삶을 버리고 떠난다. 새로운 삶을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위해 전적으로 바쳤던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난받아 마땅한 기행을 일삼는다. 자신을 도와준 친구의 아내를 빼앗고, 빼앗은 그녀를 실연에 빠져 자살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에게 타인의 시선과 남들의 비난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하고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비난하고 그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트릭랜드는 꿋꿋이 자신만의 예술을 탐구해 나갔고, 결국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후에 그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가 속세에서 벗어나고자 한 여러 기이한 행동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멀어지고자 했던 바로 그 세계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기행과 도덕적 결함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역설적으로 작품의 가치는 상승했고, 그의 인간성을 변호하려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작품의 가치는 하락했다.


 스트릭랜드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 자아실현과 자기표현만을 위한 창작 활동을 했다. 오죽하면 죽기 직전 완성한 불후지공의 역작을 태워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그가 추구한 예술은, 널리 향유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부터 그 가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현되어 세상에 존재한 바 있으면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품들이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그를 증오했던 주변 사람들이 그와 맺었던 관계를 자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의 마무리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띠게 한다.


 예술적 위대함과는 별개로, 스트릭랜드의 인간성, 도덕성의 결여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예술적인 업적과 도덕적인 결함이 같은 잣대로 평가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이룩한 결과와 업적의 크기로 다른 분야에서의 잘못을 희석시킨다. 예를 들어, 유명하지 않은 연예인의 학교폭력 사건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에 의해 처리된다. 하지만 음주운전 사고를 내거나, 마약을 하거나, 혹은 불륜으로 가정을 파탄 낸 ‘유명 연예인’들은 그들의 업적과 능력 뒤에 숨어 도덕적 비난을 회피하고 쉽게 대중 앞에 다시 선다.

 잘한 것은 칭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질책하고 명확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라는 명제가, 그가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규범적, 도덕적, 윤리적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소설이 퇴사를 꿈꾸는 사람들의 필독서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이들이 현생을 벗어나 원하는 일, 아니 해야만 한다고 느껴지는 일생의 숙명과도 같은 일을 찾기를 꿈꾼다. 스트릭랜드가 유럽에서의 안락한 삶, 상류 사회에서 벗어나 꿈을 좇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동경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기에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스트릭랜드와 같이 현실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부추기는 ‘퇴사 권장’ 소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는 돈과 지위, 가족, 친구 등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뚝심, 밥 먹을 돈이 없어 며칠째 굶으면서도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해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확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소설이 이상향의 추구를 막연히 권장한다기보다는, ‘그대의 확신이 스트릭랜드의 정도라고 자부할 수 있다면’ 도전하라는 은근한 부담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연 스트릭랜드를 동경하는 독자 중 이만큼의 확신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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