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ria May 22. 2023

동그라미 그리고

당신

일을 쉬게 되자 나를 가장 숨 막히게 한 것은 온 사방에 존재하는 동그라미였다. 大, 中, 小 접시를 쉬지 않고 돌려야 하는 서커스 단원처럼 정신없었다. 한편으로는 처마 아래에서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동심원을 보며 그치지 않는 비에 젖어가는 처연한 심정이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한 동그라미들은 대략 이렇다.     


매일 저녁 싱크대 개수대를 닦고 보리차를 끓인다.

빨래 바구니는 이틀이면 찬다.

청소기는 사흘에 한번 돌려야 모래가 밟히지 않는다.

욕실 청소한 지 일주일이면 지린내가 난다.     


이런 동그라미들도 있다.     


매일 저녁 (잔소리와 함께) 숙제를 봐준다.

체육복은 주 2회 입힌다.

일주일에 한 번 일기장을 펼치고 머리를 쥐어뜯는 아이를 격려한다.

보름에 한번 이발을 시킨다.     


또는 간헐적인 동그라미도 있다.     


두루마리 휴지, 세탁세제, 칫솔과 비누 등의 여유분을 확인하고 비축한다.

작아서 못 입게 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구입한다.

전등 스위치 틈새나 걸레받이를 닦아낸다.(언제 이렇게 먼지가!)     


‘일생’이라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실은 ‘일상’의 수없이 자잘한 동그라미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고 니체형님은 일러주셨던가? 내 인생이 영원히 회귀할지 어쩔지는 모르겠으나 하루 세 번 돌아오는 끼니의 회귀는 피할 수 없는 영원이라는 것을 나는 휴직을 하고 알았다.

     

물론 그전에도 끼니는 매번 돌아오고 반복되는 일상은 있었다. 주마다 계획과 실적을 내야 하고, 한 달에 한번 월간회의를 하고 분기별로 통계를 내거나 연간 업무 성과를 평가받는 뻔한 스케줄에 쫓겨 가며 살았으니까. 심지어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동그라미들은 그때에도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 눈치 많이 보는 나 같은 인간은 십여 년의 경력에도 여전히 업무적 긴장감을 덜어내지 못했으니, 그 긴장의 와중에 발생하는 가사와 육아는 권태로운 반복이 아닌 그때그때 처내야 할 직선형의 난관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여하튼 집에 들어앉은 나는 각자의 사이즈와 속도로 자전하는 수많은 동그라미들에 치이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방향성도 없이 오전과 오후가, 하루와 일주일이 뱅글뱅글 돌며 켜졌다 꺼졌다 하는 사이키 조명처럼 혼란스럽고 피곤하게 흘러갔다. 코로나가 한창이어서 두 아이는 제각각 온라인 수업과 등교를 번갈아 하고 때로는 1~2주간 온 식구가 무기력하게 집안에 갇혀있기도 했으니 주부로서의 지난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와는 달리 무심하고 일관되게 동그라미를 잘 돌리는 이를 한 명 안다. 남편이다.      


물론 남편과 아내가 각각 책임져야 하는 동그라미들의 관리 범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대한민국 주부들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일상의 고단함이 누군들 피해 갈 것이며, 서로를 달래 가며 살아가는 게 부부사이 아니던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데, 울지도 않고 떡을 바라지 않고 그저 눈앞의 동그라미에 최선을 다하는 이 남자를 보면  이런 게 MBTI의 차이인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심스럽다. 언제 퇴근했는지도 모를 늦은 밤에 씩씩거리며 잠든 모습이, 구겨진 와이셔츠를 벗어놓고 다음날이면 새로운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무덤덤한 손길이 때때로 내 마음을 풀벌레처럼 찌르르거리게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     


우리가 감당하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인생이 여물어 간다는 걸, 이 모든 걸 해내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 또한 동그라미 안에서 대충 휘저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이지만, 가능한 자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울지 않아서 달래줄 수 없는 당신과, 당신이 그려놓은 튼튼한 동그라미들을 말이다.        

이전 08화 거울신경의 마지노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