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없는 집에서 가드닝을 하다가 그만...
마당 없는 집에서도 가드닝을 하고 싶다면? 운치 없는 타일 바닥 베란다는 ‘정원’이라고 부르기 살짝 민망하므로, 약간의 수고를 들여 ‘베란다 정원’을 만들어보자.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원목 조립 마루를 빽빽하게 깔고, 딱 떨어지지 않는 빈틈을 예쁜 자갈로 메꾸면 어느 정도 정원의 바탕을 갖출 수 있다. 여기에 화훼단지나 동네 화원에서 데려온 식물을 비슷한 톤의 화분에 옮겨 심어서 밸런스 좋게 배치해주면 그럴듯한 무드의 베란다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우리 집 베란다 정원에는 어느덧 스무 가지 정도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얘네들을 건강하게 키우기까지 ‘식물 저승사자’가 되어 이승과 작별하게 만든 식물이 족히 수십 가지는 된다. 안타까울지언정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어엿한 ‘식 집사’처럼 보이는 사람도 ‘식물 저승사자’였던 흑역사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럿 죽이면서 한둘 살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식물은 계절이나 습도 변화에 따라 외마디 비명도 없이 순식간에 저승길로 떠나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나의 반려 식물들은 무시무시한 경험들이 쌓아 올린 흙무덤에서 생존한 억수로 운 좋은 식물들인 셈이다.
살아남은 식물 중에는 본체인 ‘주구(主球)’의 미니어처 크기인 ‘자구(子球)’를 내는 식물도 있다. 잔인하지만 본체의 왕성한 성장을 위해서는 이 자구를 잘라내야 한다. 이렇게 잘라낸 자구는 뿌리가 없어서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식물의 생명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구의 줄기를 물에 꽂아두면, 상처를 뚫고 작은 뿌리처럼 생긴 캘러스(callus)가 자라난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를 지켜보면, 뿌리처럼 보이지만 그저 줄기세포에 불과했던 캘러스라는 돌기들이 이내 진짜 뿌리가 되는 걸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자구는 하나의 온전한 식물로 살아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자구의 성장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문득문득 스쳤던 생각의 타래를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에 방학이 되면 시골집에 놀러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에겐 주름진 손과 따스한 품으로 손녀를 맞이해줄 자연 속 정겨운 시골집이 없었다. ‘시골로 여행을 가는 것’과 ‘시골집으로 내려가는 것’은 분명 달랐다. 시골집에 내려가는 아이들은 뿌리가 있는 집안처럼 보였다. 서울 어느 아파트 시멘트에 삽목 된 나의 친척들보다 왠지 소똥 냄새 품은 시골집의 비옥한 토양에서 뻗어 나온 그 애들의 집안이 진짜배기 같았다.
삼십 대가 되어서도,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되돌아갈 고향이 있는 주인공 ‘혜원’이 좋아 보였다. 비록 녹록지 않은 서울살이와 연이은 시험 낙방 소식으로 인해 실의에 빠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말없이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런 불행 속에서도 고향으로 내려와 꿋꿋이 밭을 가꾸고, 수확한 농작물로 제철 음식을 해 먹는 행복을 느낄 수 있던 것은 그녀의 엄마가 자신의 불행을 참으면서도 어린 혜원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 기다려줬던 그 시골집과 추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갓 스무 살에 독립한 ‘나’라는 자구는 캘러스의 상태로 적응 기간도 없이 닭장 같은 작은 방에 삽목 됐다. 뿌리 없이 자유와 책임을 모두 맛보았다. 갑자기 생긴 자유에 흠뻑 젖을 때는 쫙쫙 뻗어나갈 것처럼 즐거웠으나, 살벌한 책임이 짓누를 때는 쩍쩍 갈라질 듯이 삶에 가뭄이 들었다. 그럴 땐 돌아갈 수 있는 푸르른 고향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돌아간다’는 것은 출발지로 다시 향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의 독립 직후, 갑작스레 연고 없는 근교로 옮겨간 부모님 댁도, 재개발 보상받고 낯선 동네로 이사한 외갓집도 아닌, 나의 환상 속에서 완성한 따순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상적인 ‘뿌리’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 같은데, 한 동네에 오래 거주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잦은 이사로 인해 초등학교를 무려 네 번이나 전학했고, 온전히 한 학교에 다닌 시기는 중학교 3년이 유일했으니, 나에겐 ‘고향’이란 개념도 ‘모교’라는 애틋함도 흐릿하다. 종종 ‘토박이’라는 단어로 힘주어 본인을 소개하는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 동네에 오래 거주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겪어본 적 없는 내게는 ‘시골집’을 가진 친구들과 더불어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솟아난 이상 뻗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속성이므로, 온전히 마음 누일 곳 없어도 아쉬움은 접어두고 나아가야 할 땐 나아가며 적응해갔다. 나의 캘러스는 사회생활 속 다양한 수질(水質)에 물꽂이 해가며 제법 쓸만한 뿌리로 자라났다. 그러다 지금의 반려자를 만났고, 긴 연애 끝에 그의 토양에 삽목을 결심했다. 그 옛날 상상 속 시골집처럼 푸근한 토양은 아니었지만, 내가 나로서 바로 설 수 있는 토질(土質)을 갖춘 사람이라 좋았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나 함께 사업까지 이어갔기에 연애 기간은 달콤 쌉싸름한 비료가 되어 나를 복합적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이제는 시련을 겪거나 다투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더는 가본 적 없는 환상의 시골집이 그립지도 부럽지도 않은 걸 보면, 나는 이제 완전한 뿌리를 갖춘 주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마른 잎과 꽃을 따며 생각의 가지가 마구 뻗어나가게 두면, 이토록 심오한 가드닝이 되는 날도 더러 있다. 이 또한 가드닝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