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이 나를 부른다
감기몸살을 앓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아플 시간조차 없어서,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코로나로 일주일을 쉰 적만 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자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좀 쉬어보라고, 이젠 쉬어도 괜찮다고 아프게 한다. 그렇다고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고, 어젯밤에 앓고 났더니 온몸에 힘이 없고 밥맛이 없으나, 그래도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1시간가량, 헤매다 이제 좀 정신이 든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아플 시간이 없이 달려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맨날 직장을 다니고 무언가를 했던 것은 아니다. 처녀 적에는 직장 때문에 결혼해서는 아이들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아프면 안 되는 인간이라고, 내가 아프면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우리 가정에 자그마한 금이라도 갈 것 같았기에 나는 절대 아프지 않았고, 아플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죽으래야 죽을 시간이 없었고, 아프려야 아플 시간이 없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잠시 줄을 놓는 순간, 팽팽한 줄이 탁 끊기면서, 긴장이 풀리면서 나는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나면 갑자기 아픈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 또한 그동안 팽팽하게 감겨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림으로 몸이 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창밖의 나무들이 바람 때문에 흔들린다. 연둣빛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모습. 바람의 영향을 받은 나뭇잎들의 춤은 나무에게는 축복이리라.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나무에게 있어서 나뭇잎의 흔들림은 나무가 애타게 부르짖는 몸짓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모든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나뭇잎처럼 바람에 맞춰 몸을 흔들기, 이것이 지금 아픈 내 몸을 치유하는 탕약처럼 느껴진다.
아프다는 건 슬픈 일이다. 누구도 내 대신 아파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그러니 아프지 말아야 한다. 아프더라도 끝내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어떤 날, 잠시 죽음의 문턱까지 갈 정도로 아팠으면 했던 날이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내게는 별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닌 날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픈 날은 손에 꼽는다. 나는 그 흔한 감기조차 몇 번 걸리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면 코피가 나왔다. 세숫대야의 물속으로 떨어지던 핏방울, 물에 번지던 빨간 피의 기억이 선명하다. 정확 한 기억은 없지만,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몇 학년 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시작과 끝을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결혼 전까지 언제나 코피를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거의 매일 아침 반복되었던 듯하다. 집은 가난했고, 넷째 딸이었던 내가 코피를 흘려도 우리 집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먹을 것도 풍족하지 못했고, 옷도 풍족하지 못했다. 엄마는 늘 걱정을 하셨을 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고육지책으로 짜낸 방법은 내가 매주 화요일마다 100원씩 학교에 저축해서 졸업할 때 받은 만원 남짓의 돈으로 '아로나민 골드'를 사주신 것이었다. 이 약을 먹고 조금은 좋아졌던 것도 같다. 영양이 부족한 몸에 영양제를 보충해 주었으니 어느 정도 효과를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중학시절에는 코피를 맨날 흘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코피를 무지막지하게 흘리면서 살던 때는 고등학교 때였다. 주간에는 돈을 벌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가정부로 일했다. 고등학교 선생님 댁에서 일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했을 때는 그 집에 아픈 딸이 있어서 그 아이의 시중을 드나 보다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나는 그 선생님 댁에 들어가 살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 8개를 싸고 모두 출근하고 나면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고 4시에 학교에 다녔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마다 옥상에서 울었다. 나의 힘든 상황을 엄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힘든 엄마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면 안 되었다. 모든 걸 꾹 참기로 했다.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 내외와 아들 셋과 딸 하나였는데, 딸과 내가 한 방을 썼다. 나보다 어려서 나를 잘 따랐지만, 내 삶은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돈을 벌어서 학교를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너무 팍팍했다. 열여섯 나이에 견딜 수 있는 무게라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모두가 나가고 나면, 텅 빈 집에서 잠을 잤다. 한숨 자고 나면 코피를 쏟았다. 학교를 가다가 버스 안에서도 코피를 쏟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코피가 흘러나왔다. 하루에 네다섯번은 기본이었다. 2년을 그렇게 살았다. 세상의 모든 짐은 내가 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늘 우유부단했고,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 했다. 늘 나를 누르고 살았다. 내 감정을 숨겼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라고 했던가. 나는 노여워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고, 나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이제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겨 나뭇잎을 춤추게 하듯이 나는 세상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 도저한 흐름 속으로 따라가 본다. 별 다른 것은 없다. 내 생각이 바뀌었을 뿐, 나를 파괴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나로.
그때 나의 일터였던 선생님 집에 대학생 아들이 방벽에 붙여놓은 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는 지친 하루에 잠시나마 쉼터가 되어주었다. 그 시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