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그늘진 담 밑, 키 작은 얼굴 하나 환하다
침 뱉어지고 담배꽁초 짓뭉개지고 커피 세례를 받는,
이곳에서 봉숭아꽃 피어 있다
때로는 죽고, 누구는 떠난
그늘진 담벼락 아래에서 빛깔을 품는다는 건
처녀가 애를 배는 것처럼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처럼
무섭고도 거룩한 일
함께 뿌리를 내렸던 꽃과 나무들 간데없이
나를 키운 담벼락
무릎에 기대어 다리를 당겨 앉으면
어둠은 어둠을 불러들이고 별빛은 작아졌다 멀어졌다
열손가락 꽁꽁 묶고 첫눈을 앓은 청춘
한 문장을 잃고 청맹과니로 살았다
오늘
하늘 아래 얼룩덜룩 푸른 잎사귀 몇 잎 달고
꽃으로 부풀어 있는 한 권의 서사가 외줄로 서 있다
해독되지 않던 팔자들이 줄지어 분홍을 탐하며
오르락내리락,
문득, 귀가 터지고 눈이 밝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