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절을 보내면서
올해 초의 일이다. 전날 저녁을 같이 한 선배가 코로나 양성반응이라고 연락이 왔다. 집에서 가족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여 아내에게 먹을 것 몇 가지 챙겨 달라고 해서 원주에 있는 시골집으로 갔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마당에 있는 풀도 뽑고 음악도 듣고 하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몸에도 특별한 증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여든이 넘은 노모께서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원주에 혼자 가서 있다면서? 독감 같은 거니까 걱정하지 마. 먹는 거나 잘해 먹어.’
어머니는 아버님 돌아가시고 육 년 전부터 혼자 사시는데, 최근에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을 하는 사회복지사에게 카톡 하는 법을 배웠단다. 말로 하면 카톡 문자로 전환하여 보내는 방법을. 눈팅만 하시던 가족 카톡 방에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메시지를 몇 개 연속으로 보냈을 땐 모두 깜짝 놀랐다.
‘얘 들아 사랑한다. 얘 들아 건강하게 잘 지내라.’
‘사랑합니다.’
‘보고 싶다.’
전화를 해서 카톡 보내는 연습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이 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신 가 해서. 그래도 ‘보고 싶다’는 말은 마음에 걸렸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탓이다.
어머니 카톡 메시지를 받고 전화를 드렸다. 증세도 없고 밀접 접촉자일 뿐인데 쉴 겸해서 내려온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그래도 그다음 날 아침 다시 메시지가 왔다.
‘어제 잘 잤어? 괜찮아? 잘 먹어.’
‘네, 고마워요. 엄마도 잘 지내세요’ 이렇게 답장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또 문자가 왔다.
‘아들 몸 괜찮아? 잘 먹고 조심해.’
‘네, 아직 음성이에요. 조심하느라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문안인사 보내기도 잘 못하는데 여든을 훨씬 넘긴 노모께서 육십이 다된 아들이 혼자 원주에 내려갔더니 아침저녁으로 안부인사를 보낸다. 마음이 뭉클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지금은 진짜 코로나에 걸려 원주에 자가 격리하면서 이 글을 쓴다. 어찌어찌 어머님이 또 알게 되셔서 또다시 거의 매일 어머니 안부 전화를 받는다. 이번엔 직접 통화로. 카톡 연습하는 재미도 시들해 지신 모양이다. 아내와 같이 확진이 되어 같이 있다고 하니 그때부터 어머니의 말씀에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리곤 나한테는 전화하지 않고 며느리에게 매일 전화를 하신다.
아내는 내게 어머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 얘기를 들으면 다 긍정적으로 받아 주신다고 한다. 그렇다고 본인의 생각이 없으신 것은 아니다. 작은 것은 다 받아 주시고 참아 주시는 것 같다. 여든이 넘으시니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우울증 약도 드신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 몸도 아픈데 다른 사람들 생각하고 받아주는 게 쉽지 않은데, 어머니는 잘 받아 주신다. 다른 사람하고 관계에서 이가 남는 것보다 손해 보는 게 좋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말씀한 데로 사시니 훌륭한 분이시다.
나는 내가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살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이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편안함을 누려왔던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그리고 아내에게서 나의 이익이 우선 되었던 것을 당연하게 누렸다. 딸을 키울 때도 몰랐는데 이제 은퇴를 앞두고 딸이 취업을 해서 집에서의 우선순위가 나에게서 딸에게로 명확하게 바뀌니 알겠다. 처음엔 섭섭했고 지금은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살면 충돌하게 된다. 이때 어떤 기준이 필요하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자원배분이 되도록 기준을 정하면 결국 누군가의 이익은 희생되게 되어 있다. 기준을 바꾸어서 모두의 희생이 최소화되도록 한다면, 모두의 행복이 균형을 이루게 한다면, 자원배분은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정은 그런 원리가 적용되는 공간이고 그 가운데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자기 것을 다 양보하면서까지 식구들이 행복하길 바랬다. 세상이 자원배분만 합리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요즘은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아들 세 명 다 잘 키워서 대기업에 양복 입고 다니니 너무 좋아하다가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장가를 가지 않으니 다리미 팽개치면서 와이셔츠 다려 입으라고 고함치셨던 일(그다음 해에 아들 삼 형제가 다 장가갔습니다), 대학시절 이유 없는 열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입원해 있을 때 동네 사람 말 듣고 죽을 한 솥 끓여서 뚝 방에 버렸다는 이야기(그러고 나서 신기하게 열이 내려가긴 했습니다), 옆 방에 살던 장애가 있던 아이에게 마음 상하는 짓을 했다고 총채로 종아리 맞은 일(아마도 진짜로 맞은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군에서 빚지고 먹은 술 값있다고 제대하자마자 말씀드렸는데 갚으라고 군 말없이 큰돈을 주신 일(같이 제대한 동기들 외상 술값 전부), 우리 딸 유진이 엄마 몸조리해주면서 좋아했던 일(손녀 목욕시켜 줄 때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여행 가서 아내와 한 침대에서 잘 때 이불을 눈만 내밀고 폭 뒤집어쓰고 주무시던 일(숨 쉴 때 노인네 냄새 날까 봐 그러셨답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렸을 때 얘기를 해줄 때(내가 애기 때 엎고 나가면 동네 처녀들이 한번 안아보려고 난리였답니다. 사내아이가 너무 뽀얗고 예뻐서, 저는 이런 얘기 너무 좋아합니다. 아직도 다 기억하고 계셔서) 이젠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이 글을 써서 다행이다. 아니면 마무리하지 못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