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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Aug 21. 2024

상담실을 찾다 (2)

 다음 날부터 감정일지를 적기 시작했다. 일지의 양식에 따라 불안의 척도를 1-10 중에 하나로 표시하고, 그날의 신체 상태와 감정 상태를 짤막하게 기록했다. 스스로 판단한 나의 불안 수준은 대개 7~9의 수치를 웃돌았다. 책임을 물어야 할 상대 앞에서 침묵하고, 학생 한 명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리며 교실을 거의 방치 수준으로 내버려둔 데 따른 결과이니, 청구서를 받은 셈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현 시점에서 나에게 이 청구서를 감당할 만큼의 여력과 재간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를 어린애처럼 바라보고 있을 상담사 앞에서 ‘학교에 있는 동안 동료 교사와 학생들의 시선이 두렵게 느껴진다’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 채 불안의 표피만을 겨우 드러내 보인 문장들. 그 사이에서 ‘더는 교직이라는 틀에 내 몸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 괴롭다’는 것 정도가 내면에서 꺼내 올린 진실이었다.


 학창 시절, 내가 사범대학교 진학을 결정한 동기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나 사명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일 그때 나에게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처럼 달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주저 없이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사는 길을 택했을 거였다. 하지만 그 길은 ‘재능’과 ‘성공’이라는 벽에 이미 막혀 있었다. 그렇다면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선택지 가운데서 최선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국어 교사가 되면 좋아하는 문학 작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의 인정도 따라올 테니 이만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임용 시험은 세 번의 시도 끝에 통과했다. 결과 발표가 이루어진 날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장하다, 우리 딸!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나는 어머니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감격의 순간을 함께 나눴다.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성취를 이뤄냈다고 느꼈다.

 


 첫 발령지는 경기도 외곽의 P시에 위치한 어느 고등학교였다. 전교생 수가 100명이 조금 넘는 소규모 학교로 교사(校舍)에 교직원용 관사 한 채가 딸려 있었다. 관사 건물 뒤편으로 논밭이 널찍하게 보였다. 마을에 프렌차이즈 상점이라고는 C편의점 하나뿐이었고, 낡은 가게들 사이에서 농협과 하나로마트 건물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해가 지면 새까만 밤하늘 위로 달과 별이 총총히 떠올랐다.

 주민들 대부분이 마을 안에서 농사를 짓거나 가게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내가 모르고 살았던, 가난의 민낯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 절반 이상이 차상위 계층이었고, 생활보호 대상자에 해당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나는 아이들과 더불어 사랑을 배웠다.

 부임한 첫 학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았다. 부족한 실력과 잦은 실수, 여기에 미숙한 대처까지 더해져 두어 달 만에 동료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게 됐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 원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살아남아야 한다.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은 매 수업을 연구 수업에 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자고 생각했다. 여름방학 동안 2학기 수업 분량의 지도안과 PPT 자료를 만들어 두었다. 한편으로는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 보충수업을 열기로 했다. 시중 서점에서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교재를 찾기가 어려워 무턱대고 대치동 학원가를 찾았다. 그저 학창 시절에 막연하게 품었던 이미지만을 가지고서.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유명하다고 알려진 J국어논술 학원을 방문했다. 운이 좋게도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교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마침 학원의 상담 직원이 P시 출신이어서 뜻하지 않게 교재 여러 권을 무상으로 얻게 됐다.

 “저도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수업을 진행하시면서 교재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메일 주세요.”

 그녀에게서 반짝이는 호의가 담긴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보충 대상으로 염두에 두었던 학생들을 불러 수업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연 몇 명의 학생들이 내 제안을 수락할지 반신반의한 상태였는데, 의외로 거의 전부가 수업을 받아보겠다고 했다. 성적이 안 나오는 학생들은 학업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내가 오해했던 거였다.

 나에게 곁을 내어준 학생들에게 기왕이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J학원에서 받은 교재를 참고해서 단계별로 학습지를 만들어 매주 두 차례씩 기초 수업을 진행했다. 차츰 학생들의 눈빛에 하나 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그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서, 어떤 학생은 진정으로 공부에 열의가 붙어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력의 결과로 실제 성적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개중에 한 명은 2학기 기말고사에서 성적이 50점 가량 올랐다. 30점에서 80점으로. 그 아이의 기쁨이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아이들과 성적표에 적힌 숫자 이상의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필요한 환경과 개인의 노력이 갖춰졌을 때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잠재력에 대한 믿음과,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내고 있다는 소속감. 나에게 교재를 선물해준 J학원의 직원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관심을 쏟은 만큼 교실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었다. 신규 교사로서 혹은 한 개인으로서 여전히 부족하고 서툰 점들이 많았지만, 학생들은 나를 대체로 ‘좋은 선생님’으로 받아들여주었다. 그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동료 교사의 시선도 얼마쯤 누그러졌다.

 그 해를 보내고 이듬해 3월에 1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내가 발령 첫해에 담임을 맡지 않아도 됐던 이유는 신규 교사에게 시행착오를 경험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교장 선생님의 배려가 담긴 원칙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마음의 준비가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진 상태에서 내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 해 동안 반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정성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과 백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개별 상담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매일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버스가 끊긴 아이들을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챙겼고, 봄가을이면 볕이 좋은 날을 골라 한 번씩 교정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단합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와르르 웃는 학생들의 얼굴이 좋았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때의 나는 분명,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과 십여 년 사이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더는 노력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고, 증오와 피해 의식, 죄책감, 자존심으로 뒤범벅된 마음들이 괴물의 형상을 한 채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를 믿을 수 없었기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교사로서 좋았던 기억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감정 일지를 쓰는 동안에는 그 기억을 단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더 이상 손에 닿을 수 없는 아련한 환상 같은 경험으로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학생들을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전처럼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내면의 토양이 황폐하게 메말라버렸다고 느꼈다.


 “웃을 때 마지막에 입꼬리를 비트는 버릇이 있어요.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냉소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요.”

 상담사의 지적은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알려줘서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또 퍼석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담자로서 나는 상담사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그녀는 상담 도중에 내 이름을 잊거나 교과명을 틀리게 말하곤 했다. 영어 선생님이셨죠. 근데 성함이 뭐였죠? 남연이에요. 영어가 아니라 국어입니다. 대답을 하면서 나는 그녀의 앞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던지곤 했다. 저기에는 도대체 뭘 적는 거야. 한 회차에 10만원이나 되는 돈을 받으면서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내담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확인하지 않는 건가?

 상담이 8회차 정도 진행됐을 때 그녀에게 쌓였던 불만을 토로했다.

 “솔직히 선생님의 이런 태도가 저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져요. 내담자의 입장에서 상담자를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상담사는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대더니,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한 투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이 일로 선생님이 상담을 그만둔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당신도 나만큼이나 어린애였잖아. 내가 그녀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10회의 상담을 끝마치고 나는 아무 미련 없이 상담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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