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움 Dec 11. 2019

Part2. 가속도의 시대, 고전적 비법으로 살기

매직카펫 매거진 Vol10. 사마리아 님 (2)

사마리아 님의 인터뷰는 'Part1. 땅고, 몸으로 쓰는 시'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piuda/38




주제를 바꿔볼까요. 시집도   있으시잖아요. 요즘도 쓰세요?


요즘은 잘 안 써요. 요새는 텍스트보단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문학 장르도 많은데 왜 시였는지 궁금했어요.


땅고도 그렇지만 별자리와 사주도 상징이거든요. 예를 들어 간목이라고 하면 그 글자가 상징하는 것을 푸는 거예요. 문장으로 하나하나 풀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게 산문이라면 시는 단어 하나에 많은 응축을 담아 놓는 거죠. 이 사람에겐 이렇게 읽히고 저 사람에겐 저렇게 읽히고. 나는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단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만약 미래에 하고픈 일이 뭐냐고 물으면 지금도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시를 쓰는 거. 시인이 되는 게 내 목표예요.


시집을 내신 적이 있는데 그럼 시인이지 않나요?


시인은 다른 일을 하지 말아야죠. 돈을 벌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에 전념할 수 있는 삶 말이에요. 지금은 돈도 벌고 땅고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는데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건 시인으로서의 3~4개월 정도의 삶. 모든 생활 자체를 내 시에 일치시키고 싶은 욕망이 지금도 가장 강렬하게 있어요.

하지만 아직 내 삶의 수준이 그렇게 안 되었다고 봐서 먼저 내 삶을 만들고 난 후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삶을 만들어간다는 건 세상을 공부한다 이런 건가요?


시인이 하나의 단어를 잡는 데는 몇십 년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요. 변명일 수도 있는데 아껴두는 거죠. 연인끼리도 맨날 사랑한다고 하면 그냥 밥 먹는 것과 같은 것이 되듯 생활 속에서도 시를 쓸 수는 있겠지만 응축이 필요해요. 어떤 감정이 들었을 때 그걸 몸에 쌓아두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시어가 터질 때가 있어요.

요즘에는 아무래도 땅고가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내가 몸으로 시를 쓰면서 창조적으로 살고 있다 보니 시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제가는 텍스트로 그 응축을 풀 때가 오겠죠. 그때만 기다리는 거예요.


사마리아님에게는 그 하나의 단어가 있어요?


‘바람’. 내가 어떤 일을 겪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한 마디로 하면 바람. 그 바람이란 게 ‘춤바람'의 바람, '바람 맞았다'의 바람이 될 수도 있어요. 누군가 나뭇잎에 감흥을 느낀다면 그게 그 사람의 시어거든요. 그런 시어는 누구나 갖고 있지만 그걸 시로 쓰는 건 별개의 문제죠. 그렇다고 등단을 해야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예전에 저한테 그런 말씀 해주신 적 있어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될 거 아니면 글 쓰면 안 되는 건가요?”라고. 그리고 일단 쓰라고 하셨죠. 제가 지금 ‘매직카펫 매거진’을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몇 년 전에 들은 그 말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별자리에는 열두 사인이 있고 사주에도 열두 띠가 있죠. 그냥 살면 되는데 옛날 사람들은 왜 기한을 정했을까요? 달력을 만들어서 24절기를 만들고 24시를 구분하고. 자꾸 기한을 나누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되기 위한 열두 계단이 있다고 하면 그 계단 중 아홉 계단까지는 가야 해요. 그 아홉까지 간 사람의 남은 세 계단은 그냥 폭발하는 거예요. 9년 간 매일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남을 의식하지 않고 공부하고 연습해온 사람의 글이 폭발해서 3년 동안 작품이 되어 나오는 게 삼재예요.


삼재가 나쁜 의미가 아니네요?


그렇죠. 삼재가 오면 뭔가가 터져요. 별자리에서도 뉴문이라는 발산의 시기에 대한 이론이 있어요. 제가 그런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랐어요.

사람들이 똑같이 겨울은 겨울로 느끼고 여름은 여름으로 느끼듯이 그 폭발의 시기를 똑같이 느껴요. 예를 들어 9년의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그 발산의 시기가 와서 무리하게 한다면 그걸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람과 같겠느냔 거죠. 그런데 사주팔자에 그 사람이 9년 동안 노력을 했는지 나와있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개인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저의 일은 그런 걸 말해주는 거고요.  


아까 그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말 말이에요. 저는 그 말이 남들의 인정이 없더라도 일단 꾸준히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거든요. 블로그, 팟캐스트, 유튜브 같이 개인의 매체가 늘어나면서 그런 게 더 중요해진 것 같기도 해요.


사람들은 요즘 유튜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 온라인 세계를 이끄는 사람들은 40대에서 50대예요. 그 사람들이 매체를 시작한 건 19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에요. 그때부터 이미 유튜브가 준비되고 있었던 거예요. 유튜브 하나가 되려면 30년을 봐야 해요. 초심자들은 그 사람들이 설계한 세상에 뛰어들 뿐이에요. 지금 고수들은 이미 30년 후의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 30년을 어떻게 준비해요?


생활 속에서 PC통신을 하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니까 너무 시류에 담을 쌓지 않는 게 좋아요. 그리고 유튜브냐 팟캐스트냐 보다 중요한 건 내 콘텐츠를 쌓는 거예요.

가끔 시인, 작가가 될 수 있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답은 딱 하나예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썼냐는 거죠. 매일의 습관으로 1,000장의 원고지를 쌓아봤는지, 아니면 블로그를 1년 정도 매일 써봤는지. 그런 사람은 팟캐스트, 유튜브가 아닌 다른 매체가 나타나더라도 그 풍부한 콘텐츠로 얼마든지 하루만에 스타가 될 수 있어요. 이렇게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는 때일수록 제일 중요한 건 콘텐츠이고, 질보다는 양이예요. 매체만 믿고 가다가는 PC통신 세대가 30년 동안 준비해온 그곳에 내 콘텐츠를 뺏길 수도 있으니까.

요새는 시간이 압축되어서 옛날만큼 길게 하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개월이나 1년만이라도 하면 돼요. 그런 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다양화된 세상일수록 고전적 비법이 중요하다는.


팟캐스트 녹음실에서의 사마리아 님.


사마리아님은 본인의 유튜브 영상에 대해 유서를 쓰듯 하고 싶었다고 설명하셨는데 그건 어떤 의미예요?


앞에 한 이야기랑 연결되는데 1990년대 말 IMF 즈음부터 온라인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어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매일 영화와 정치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고정팬이 1만 명이 넘었어요. 내가 별자리 상담 오픈한다고 했더니 따로 영업을 안 했는데도 그분들이 위로차 상담을 왔다가 좋다고 하면서 순식간에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 10년의 글을 써온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나의 시작은 늘 그랬어요. 매일의 습관으로. 내가 영상은 처음 해보는 건데 그게 내 미래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하죠.


일종의 씨 뿌리기군요?


그렇죠. 그리고 죽기 전에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건 자기 모습을 남겨두려는 의미가 있어요. 예쁜 얼굴이 아니라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면서 늙어가는 모습을 남기다 보면 언젠가 아픈 모습도 담길 것이고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써 내가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좋은 유서가 되지 않을까요. 삶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어요. 언젠가 병이 들면 내가 병마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이 병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은. 이렇게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땅고는 말하자면 생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놀이의 영역이잖아요. 그런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해외도 다녀올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원동력은 뭔가요?


놀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놀이라는 말은 그냥 즐거움, 쾌락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 내가 이 놀이를 함으로써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을 포기한다는 뜻이에요. 인간 자체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잖아요. 그 존재의 신경이 집중되는 곳은 고통이에요. 이거 말고 다른 걸 할 수도 있는데 이걸 한다는 것은 이걸 감당해야겠다는 각오에서 하는 거지 쾌락 때문에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관점으로서의 놀이의 의미가 더 확산되었으면 해요. 너무 심각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뭔가 하나에 꽂혀 있는 사람은 단순히 즐거워서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맞아요. 제가 봐도 어딘가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즐겁지만은 않고 힘들기도 한데 계속하더라고요.


그런데 좀 더 나아가야 하죠. 놀이가 아니라 고통을 즐기자. 이러면 또 집에 가요. 안 해요. 땅고에서도 그냥 외로워서 친구들과 대화하고 춤추려고 온 사람들은 오래 못해요. 결국은 사명감이에요.  


사명감이요?


인생의 직업을 못 찾아서 오는 상담자들에게 내가 늘 하는 말은 직업은 장기자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장기자랑으로 하는 사람은 절대 자기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체육을 잘한다고 운동선수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가 부족하고 아파서 그걸 극복하려고 할 때 괴력이 나오거든요. 마찬가지로 단순히 즐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서 땅고가 안 사라지도록 지켜가기 위해 고통 분담을 하는 무언의 행동도 사명감이죠. 굳이 말하자면 성실함이 아닐까 해요.


마지막으로 명리를 하는 사마리아님, 땅고 하는 사마리아님, 시 쓰는 사마리아님을 다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각각은 어떤 존재들인가요?


별자리 명리는 말 그대로 사명감. 이런 명리를 하는 사람들은 작가적 능력이 있어야 해요. 이론도 중요하지만 이론을 구성하는 능력이 없으면 절대 해석이 안돼요. 이 분야를 문학화, 철학화하는 사명감이 있었고 그런 태도를 제시하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광고도 안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나를 찾아준 것에 대한 사명감, 업보, 내가 이런 일을 하도록 태어났구나 하는 의무감이 있어요. 마치 군인들처럼 복무하는 느낌이죠. 그래서 개인적인 행복은 많이 내려놓았어요.


땅고와 시는요?


땅고는 사람을 관찰하는 거죠. 우연한 만남과 음악과 자신이 제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억압된 것이 표출되는 게 있어요. 시는 내가 되고 싶은 미래. 그걸 위해 평소에도 감성을 잃지 않기 위해 땅고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내가 땅고를 7년 했는데 그 하루하루가 내 감성을 보호해준 거죠.

아까 행복을 포기했댔잖아요. 그 행복은 외부의 기준이에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타고. 그렇게 되면 나는 상담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일부러 그렇게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만약 내가 땅고 안 했으면 그 시간에 돈도 많이 벌었겠지만 이 감성을 지키기 위해 내가 땅고라는 외로운 섬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거죠.




인터뷰 후에 기억에 남는 표현 중 하나는 '아껴둔다'는 단어였다. 언젠가 시가 사마리아 님의 밖으로 나올 그때를 위해 아껴둔다는 표현이 참 좋았다. 미룬다거나 기다린다는 말보다는 좀더 능동적인 태도가 담겨있었다. 사마리아 님과 이야기하면 늘 그렇다. 한 마디가 바뀜으로써 나의 시각이 달라진다.


결국 매일의 행동이 쌓인 것이 습관이고 그 습관이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사마리아 님의 말은 그래서 내게 더 의미있게 다가왔고, 2019년의 마지막 인터뷰로써 적절한 질문을 남겼다.


나는 잘 쌓아가고 있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뭔가를 해나가고 있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매직카펫 매거진’은 그동안 잘 해왔나? 남은 2019년, 올해 만난 10명의 매직카펫 라이더들의 인터뷰를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며 이 질문들에 답해볼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Part1. 땅고, 몸으로 쓰는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