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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해리 Apr 24. 2023

4. 무릎 꿇고 쪽잠을 자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 무릎 꿇기 전에 나에게 주시오! 제발!!

(며칠 전 적다 말았던 글을 조금 더 적어서 올려봅니다.)


이게 나의 한계인가? 500ml 커피 페트병이 책상 주위에 쌓여있고 피로회복제 음료 빈 병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하루 24 시간이 애석하게만 보이고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 보이던 날이었습니다. 촉박한 시간에 (예전이라면 말도 안 되는 마감기한을 두고 탓하겠지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무자비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해내야 하였고 알고 있는 것, 모르는 것 모두 짜내서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누가 말해도 들리지 않았고 해가 떴었지만 오후 5시경 어린이집 봉고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지나갔고, 저녁 모임에서 귀가하는 발걸음이 나타났다가 없어지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주말이 되었고 길거리 사람들은 비가 그친 주말을 지나서 분주하게 외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월요일을 걱정하는 분들이 보였습니다. 식사로 먹은 것이라곤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고 음식보다 잠을 깨기 위한 것들이 더 많은 상황.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육체가 그간 쌓인 피로를 느끼는지 연신 몸밖으로 표출합니다. 하지만 마음놓고 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낸게 20분만 눈 붙였다가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담요까지 덮고 자면 아예 못 일어날까봐 무릎을 꿇고 쪽잠을 자기로 합니다. 


참. 이게 뭐라고.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을 던져버릴까 싶었고 (그럴수는 없겠다 싶어서 오른손에서 왼속으로 스마트폰을 옮겼습니다) 아예 다 엎어버릴까 싶었지만 그것도 옳은방법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망할 기분이 들더라고요.


20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났는지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어쨌든 일은 마쳤습니다. 한 숨을 돌릴 수 있으니 (그래봤자 정말로 한숨을 돌리고 일 아닌 개인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반나절이지만) 다음 일들을 해내야 할텐데 이런 사태가 반복될 것이고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자조적인 웃음으로 현타들을 무마시키기에는 너무 길게만 느껴졌거든요. 현명한 방법이 필요했어요. 


장기든 단기든 여행은 개인적으로 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돈도 돈이겠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는 반복할 수 없었어요. 지속적이기 힘든 방법이에요. 술을 왕창 마셔볼까? 하지만 이 방법은 다음날에 숙취를 선물해서 안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술도 쎄지 않으니까, 저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책은 못 찾다가 어디서 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어느 유명한 연예인 분이 출연하셨던 프로그램인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조금 독특한 영상이어서 필(feel)이 꽂혔습니다. 


무슨 영상이냐면,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취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장면이었는데요. (풀버전은 못 봤어요) 그 연예인 분이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푸신다는 거예요. 그냥 어떤 시험을 보려고 푸는 게 아니라, 머리 식힐 겸 수학 문제를 찾아서 푼다는 거죠. 독특하지 않나요? 


보통 여행, 먹방, 운동과 같은 일상을 기대했는데요. 수학 문제를 푼다니. 영상을 봤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어요. 수학 문제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익숙하며 단순하고, 소비적으로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런 것이라면 '현타' 세게 오는 현실에서 유용하게 활용가능한 방법처럼 보였어요. 적어도 상대적으로 돈 적게 쓰고, 굳이 루틴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필요에 따라서 시간날 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대환영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나, 찾아보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방법이 있더라고요. 수학공부를 좋아하던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수'학에 대한 것은 어려웠지만. 적어도 두 눈, 두 손이 있으니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있었어요. 



다음 '현타'가 왔을 때 시도해 봤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무릎 꿇고 쪽잠을 자야 하는구나' 직감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당장 손에 잡히는 책 한권을 붙잡았어요. 그리고 '시간이 많다'라고 되새기고 나무늘보처럼 한줄, 한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여기저기 외부로 주의를 두고 있던 것들이 확~ '한 지점'으로 거둬 들여지더라고요. 많이 아니고, 딱 그 날은 다섯 페이지 읽었습니다. 눈이 자꾸 일더미 쪽으로 향하려던 것을 붙잡느라, 조금 힘이 들기도 했지만 거북이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읽었습니다. 


마음이 다시 잡혔을 때 일을 이어가니까 더 잘 풀리는 기분도 들었고요. 근데 그 다음 현타의 순간에는 그방법도 마땅치 않은 겁니다. 책 몇 줄을 읽고서 어느 정도 주의력을 회복했는데요, 다시 주의력이 흩어지려고 했어요. 조금 더 높은 처방이 필요했습니다. 방금 읽은 1페이지에서 눈에 밟히는 문장이 보이면 그 뜻도 모르고 종이 위에 적었습니다. 이 때도, 고양이가 꾹꾹이 하듯이 한글자 한글자 눌러서 최대한 천천히 썼습니다. 앞서서 그냥 눈으로 읽었던 것보다는 좋았어요. 주의력이 조금 더 빨리, 더 단단하게 모였거든요.


최근 이렇게 현타-회복 고리를 겪으면서 예전에는 자주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멀리했던 것을 다시 불러 들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책이에요. 저를 아시는 분들은 2년 넘게 빡세게 책에 빠져 살았다가, '(그러면 안 되지만) 죽거나 망했을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책'만 남기고 책의 삶을 정리했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남은 자산을 '회복 자산'이라고 명명하는데요. 회복 자산에 해당하는 것들 목록에는 아직까지 변동이 없지만, 그 외 회복 겸 인풋을 늘리는 용도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제 머리를 쎄게 때리는 책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회복이 끝나면 다시 관련이 없는 관계로 돌아가겠지만 '읽는다' 행위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책의 세계에 흠뻑 젖어들었다가 지금의 세계로 건너오고, 모종의 계기로 잠깐잠깐 루틴하지 않게(루틴이 되면 이것도 일처럼 느껴질까봐) 발을 담그고 빼고를 반복하게 되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한 가지 있다면 한 권의 책에서 인생이 바뀌는 마법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읽는다' 행위를 하고서 말했던 것처럼 현타에서의 탈출을 경험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단일뿐.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인생이 망합니다' 와 같은 상술에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불규칙적으로 보니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우선, 럭키 펀치처럼 얻어걸리는 것도 꽤 있습니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지식 수준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인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책에서 연결되지 않았던 실마리를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고를 때에도 신중하게 고르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전에 무작위로 몇 권의 책을 뽑아서 읽는 독서도 했었는데 지금은 '불규칙'적이니까, 그러니까 '이 책이 아니면, 내일은 다른 책을 읽으면 되겠지' 라는 마음이 아니다 보니 이왕 인풋 겸으로도 읽는 것.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양질의 내용이 담긴 책을 찾아 읽습니다. (물론 양질의 내용을 기대했는데 독서 역량이 부족하거나, 기대와 다르게, 실제는 양질의 내용이 없다고 판단되면 다 읽지 않고 바로 덮어 버리지만)



앞으로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쪽잠을 자는 숱한 밤이 있겠지만 그럭저럭 비교적 단순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청소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참 재미있고 웃기기도 해요.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이름도 모르는 어느 프로그램에서 모 연예인에게 힌트를 얻었고. 저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한 인생을 사는 분에게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해볼 수 있는 것을 못 찾다가 '그냥' 해봤던 것이 의외로 효과가 좋았고요. 너무 많은 에너지 와 시간을 뺏지 않는다면 지속할 생각도 있어서 나름 내 인생의 방법 한 가지를 알게 된 기분까지 드니까요. 현타가 온다고 현타만 느낄 게 아니라 뭐라도 해보는 말이 일정 부분 공감되는 나날입니다.


신기한 건, 제가 어디가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비교적 현타와 종종 싸우는 제가, 뭐라고 가르칠 깜냥도 안 되고..) 제 주변에 계신 분들도 언젠가부터 시간과 돈을 맹목적으로 소비하는 행동들을 조금은 줄이려는 게 보인다는 겁니다. '0'에서 '1'로 넘어가는 순간, 그리고 '첫' 손님이 영원히 기억나는 것처럼 이런 쪽으로 시도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던 분들이 한번은 비슷한 생각을 해보고 적어도 한번은 적용해 보신다는 거죠. 정말 신기합니다.


요런저런 재미들이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필요에 따라서는 무릎 꿇고 자는 날도 있겠죠? 처음으로 학교에서 사춘기 감성에서 미래를 대화로 나누었던 중학교 3학년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하였던 인생을, 원하는 직장을 구한 직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인생이지만. 가끔은 이런 재미도 있습니다. 



인생, 그거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일도 종종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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