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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안 Jun 12. 2023

유월

사랑은 마치 식물의 마디 같아서

 이제는 한복판이 되어버린 계절에 앉아 조금은 서운함을 느꼈다. 환절기가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빈 것만 같다.

유월부터는 여러 일들이 있을 것이다. 햇빛이 이토록 뜨거웠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고, 수박 한 통을 사다가 조각으로 자르는 일들. 매 해마다 같고, 그래서 조금은 권태로운 일들.


 격변의 시기가 지나면 한동안 조용하고 권태로워지는 것이 당연한데, 나는 왠지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만 같아 마음으로 어려워했다. 환절기를 지나 움직이지 않는 여름은 죽은 것일까. 변하지 않는 창밖의 풍경과 여전히 그렇듯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 또한 죽은 것일까.


 수없는 변화와 새로움을 요구하던 시간이, 관계들이 있었다. 마치 부풀어오르지 않는 관계는 죽은 관계인 것처럼. 이보다 더욱 마음이 어렸던 그때의 나는 쉬이 자라나지 않는 나와 누군가의 감정을 자주 다그쳤던 것 같다. 지금은 우리의 관계가 자라날 때라고, 더 빨리, 우리가 서로를 믿고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꿈꾸던 이상향이 펼쳐질 거라고 믿으며.

 사랑은 보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었기에,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격변은 모래성 같던 우리라는 존재를 조금씩 깎아나갔다. 그것도 모른 채, ‘더 빨리’를 외치며 수문을 열어젖힌 나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사랑은 마치 식물의 마디 같아서, 하나씩의 크고작은 사건들을 통해 자라고 풍성해진다. 그동안 서로를 오가던 마음을 양분 삼아 가지를 치거나 더욱 높고 굵어지며, 어느샌가 보면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도록.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꾸준히 수분과 영양을 준비해두는 것이겠다. 충분한 시간과 애정을 주고, 분명 천천히 자라나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내 몸을 갉아먹어가며 과도한 마음을 쏟거나, 어서 높아지라며 사랑의 줄기를 잡아당기지 않는 것.

 

 이번의 여름은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내볼 생각이다. 멈추듯 느리게 지나가야 하는 일도 있다고, 계절의 마디를 지나 조용한 이 즈음에도 식물처럼 천천히 자라는 마음들도 있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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