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많은 것들에 담긴 혼탁한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선연히 마주할 수 있게, 마주할 수밖에 없게 하는.
또다시 겨울이 왔다. 수많은 일과 사람들이 계절을 따라 밀려오고, 또 계절을 따라, 혹은 무언가 마음에 맞는 것들을 따라 자신의 자리로 밀려간다. 비로소 직면의 계절이다. 여름의 빛과 더위에 숨어 자신을 밝게만 포장했던 것들이 껍질을 벗은 눈으로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공허하지 않느냐고, 허탈하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계절은 모두에게 공평해서. 내게도 그런 사람과 그런 마음과 그런 일들이 있었다. 맑은 마음으로 마주보아야만 할 사람이 생겼고, 무엇도 얹지 않고 마주했던 사람들이 조금의 슬픔을 남기고 떠나가기도 했다. 오직 무엇도 담기지 않은 공기와, 불안과, 조금의 슬픔만이, 자그마한 껍질들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비로소 마주한 마음에는 크고작은 생채기만 가득이었다. 떠나간 사람의 사정과 다가오는 사람에게 선뜻 건넸던 믿음이 그 붉은 자국들을 덧대고 또 덧댄 것이다. 언제쯤 이 일을 그만하게 될까,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덧대고 또 덧대는. 그런 순하고 아픈 방식으로 나는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떠나가던 어느 사람의 사정이 그랬다. 선뜻 건넨 마음이 칼날처럼 돌아오다 보니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편이 낫더라고. 믿음과 행복을 위해 마음을 건네고 실패하는 삶보다, 무엇도 건네지 않고 어떤 상처도 감내하지 않는 삶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한동안, 멀리 돌아간 그 사람을 생각하는 와중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아파하는 존재는 결국 사람이지 않을까, 요즘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이잖아, 같은 생각을 말꼬리마다 늘어놓으며. 사실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믿음으로 쌓는 행복보다 쌓인 상처가 더 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비관도 묻어났다. 그게 현실이니까. 현실은 동화 속 그림처럼 모두가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모두가 혼자라서 불행하고 외로운 이 세상을 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아름다운 몇몇 사람들을 보라고. 마음 속 가장 얕고, 연하고, 상처가 많은 마음이 그런 말을 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의 계산이 아니더라도, 믿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야지. 폐허에서도 싹틔우는 마음이 있어야지. 사람이라면, 계산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희망 같은 것이 있어 여러모로 피곤한 나날이다. 한번 더 딛고 일어날 구석이 있어 고통스러운 나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원망스러운 마음에 한번 더 마음을 기대어 보는 것은, 새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건네는 용기와, 새 믿음과, 떠나간 사람들이 남겨 둔, 슬픔의 껍질 사이 모래알 같은 추억들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겨우 이만한 마음을 새벽에 쓴다. 다시 찾아올 아침은 그 작은 믿음들에 볕을 더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