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나는 또다시 철학적 갈림길 앞에 섰다.
오늘의 질문은 바로 “인간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내 앞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 첫 번째 문 – 인간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 두 번째 문 –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강렬했고,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터무니없는 말이지!”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그에게 운명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초인(Übermensch)’이 되어 운명을 지배할 것을 요구했다.
그 옆에는 장 폴 사르트르가 서 있었다.
그는 니체보다 더욱 냉철하게 말했다.
“인간은 운명 따위에 지배받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의 선택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운명론을 강하게 부정했다. 운명에 순응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나는 이들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문을 나섰다.
다른 문을 열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운명을 바꾼다고? 그것은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조차 자유롭지 않다.”
그에게 인간은 본능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일 뿐이었다. 우리의 행동조차도 미리 결정된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서 있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그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나는 다시 갈림길 앞에 섰다.
• 니체와 사르트르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 쇼펜하우어와 에픽테토스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운명이란 거대한 흐름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일까?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