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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아홉 번째 밤 – 일본에서의 삶

by 나바드

아홉 번째 날, 우리는 일본 사회 속에 섞여 살아가면서도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노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여기서는 우리가 소수니까 우리 걸 챙기지 않으면 금방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포사회가 주최하는 각종 문화행사, 명절잔치, 운동회 등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애들한테 우리말 가르치고 풍습 알려주려고 추석잔치, 설날모임 이런 걸 열었지. 김치 담그기 체험도 하고, 아이들 한복도 입혀보고….” 일본 땅 한구석에서라도 고국의 문화를 잇고자 애썼던 것이다.


특히 민족교육이 중요했다. 할머니는 자녀들을 가능한 한 조선인 학교(조선학교)에 보냈다. “일본 학교 가면 우리 역사도 안 가르치고 일본 이름 부르라 하니, 차라리 조선학교가 나았어.” 조선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국어(조선말)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 북한계열 학교였기에 북한 노래도 배우고 김일성 초상화가 걸린 교실이었지만, 그럼에도 할머니는 아이들이 자기 뿌리를 아는 게 중요했다고 말한다. 현재 일본에는 60여 개의 조선학교와 한 개의 조선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재정난과 차별로 어려움을 겪지만, 여전히 재일동포 사회의 문화적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할머니의 손주 세대 중에도 한국학교(한국계 국제학교)에 다닌 이가 있었다. “거기서 한글도 배우고 교복 입고 다녔는데,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몰라.” 그녀는 웃으며 사진첩 속 교복 입은 손주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동포 2세, 3세들이 그런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 세대는 일본 학교에서 일본 친구들과 똑같이 자랐다. 할머니의 자녀들 중 둘은 일본 공립학교를 다녔는데, 졸업 후에는 거의 일본인처럼 생활했다고 한다. “집에선 분명 조선사람인데 밖에 나가면 완전 일본사람으로 보이니, 정체성이 혼란스러웠을 거야.” 실제로 3세대쯤부터는 한국어를 전혀 못 하고 사고방식도 일본적인 이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할머니 세대는 집안에서만큼은 한국식 예절과 언어를 유지하려 애썼다. “온 가족이 모이면 꼭 우리말로 대화하게 했어. 애들이 싫어해도 계속 시켰지.” 그 덕에 몇몇 손주는 지금도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한국어로 할 수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일본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숨기지 않으려 했다. 앞서 말한 대로 1980년대 이후론 본명인 “김”으로 불러달라고 했고, 김치나 잡채 같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동네사람들도 갈수록 우리한테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더라고. 처음엔 경계하던 이들도 나중엔 김치 담그는 법 좀 알려달라고 하고, 허허.” 세월이 흐르자 일본 사회도 변해갔다. 1990년대 이후 한류 열풍과 한일 교류가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등을 거치며 일본에 한국문화 붐이 일었다. 할머니는 “요즘 젊은 애들은 방탄소년단인가 하는 한국 가수들도 좋아한다지? 우리 땐 상상도 못 할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주변의 일본 이웃들도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어를 배우러 다니는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외국인, 특히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할머니는 손주 세대가 일본에서 취업이나 결혼을 할 때 미묘한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했다. “서류 절차도 복잡하고, 국적 얘기 나오면 표정 굳어지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우리 때랑 비교하면 천국이지 뭐.” 실제로 젊은 재일코리안들은 많이 동화되어 일본인과 다름없이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국적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아예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젊은이들도 상당수다. 예전 같으면 “변절” 취급받았겠지만, 이제는 가족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다. “우리 손자 하나도 몇 년 전에 귀화했어. 나한텐 미안하다고 하더군. 난 괜찮다고 했지. 지금 시대엔 일본 사람 돼도 가슴속까지 일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께.”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1년에 1만 명 넘는 재일동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할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고, 젊은 세대는 그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정체성 문제와 별개로, 재일동포 사회는 점차 규모가 줄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일본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서 동화되고, 또 상당수는 한국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우리 같은 ‘조선적’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2만 명 남짓밖에 없다더군” 하고 알려주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일본에 등록된 한국 국적자는 약 41만 명인데 반해, 조선적을 포함한 북한계 재일동포는 2만 4천여 명에 불과하다. “다들 떠나고 없네. 좀 씁쓸하지.”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피는 이어질 테고, 우리 문화도 없어지진 않을 거야. 우리 애들이든 손주들이든, 언젠간 자기 뿌리를 돌아볼 날이 올 거라 믿어.” 그녀와 동포들이 일본 땅에서 지켜온 정체성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고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마음속 고향은 잊지 않은 이들, 그들의 치열했던 삶과 지키고자 했던 문화가 있었기에, 오늘날 다문화 일본 사회의 한 축으로 재일한인들이 당당히 자리할 수 있게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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