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열 번째 밤 – 할머니의 후회와 소망

by 나바드

열 번째 밤, 우리는 어느덧 마지막으로 약속한 열 번째 이야기에 다다랐다. 이날 할머니는 그동안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며 후회와 소망을 들려주었다. “참 오래도 살았네… 뒤돌아보면 한세월이구먼.”


먼저 후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할머니는 가장 큰 후회로 “고향에 한번 못 가본 것”을 꼽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온 후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평생을 보낸 것이다. “부모님 산소도 못 찾고… 동생들도 결국 얼굴 한 번 못 보고… 그것이 천추의 한이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1990년대 이후 남북한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그 무렵 할머니는 이미 몸이 불편해져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내 고향 마을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자꾸 꿈에 보이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또 다른 후회는 아이들에게 더 풍족한 삶을 주지 못한 것이었다. 재일조선인 1세대로서 온갖 고생을 시키며 키운 자녀들이 가슴에 밟힌다고 했다. “남들처럼 떳떳한 국적도 못 주고, 일본에서 차별받게 하질 않나… 참 미안한 짓이었지.” 그녀는 자신의 선택 일본에 남은 것, 그리고 조선적 신분을 고수한 것이 옳았는지 가끔 반문한다고 한다. “만약 그때 우리도 한국 국적을 빨리 취득했다면 애들이 덜 힘들었을까? 아니면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인생을 돌이킬 수 없기에, 그저 후회로 남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고, 마지막 소망으로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 조국의 통일이다. “죽기 전에 통일되는 거 보고 눈 감으면 여한이 없겠네.” 평생 분단의 고통을 안고 살아온 그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 되는 장면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다. “내 동생들 소식도 통일이 되면 알 수 있지 않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라도.” 그는 작은 목소리로 기도하듯 말했다.


둘째 소망은 후세들이 더는 차별받지 않고 당당히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할머니 세대의 희생 덕분에 손주 세대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여전히 혐오와 편견이 존재한다. “내가 겪은 설움은 우리 손자들 땐 없었으면 해.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서든, 자기 뿌리를 숨기지 않고도 어깨 펴고 살 수 있길 바라지.” 그녀는 특히 일본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더 열린 마음으로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가길 희망했다. 재일조선인 1세대들이 겪은 가장 어두운 시절(1950~60년대)의 기억이 잊히지 않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록하고 있는 이 이야기 자체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당부했다. “있잖나…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았다는 걸 잊지 말아 주게. 자네처럼 한국에서 온 젊은이가 알아주니 고맙고… 부디 가서도 많이 알려주게나.”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신의 삶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증언임을,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일이 남은 자들의 몫임을 알고 계신 듯했다. 나는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는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구십 년 삶의 희로애락을 들려준 할머니는 피곤했는지 이내 자리를 떴고, 나도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도 열 밤을 더, 나는 할머니와 주변 인물들의 얘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남은 일정 동안, 할머니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동포들의 다양한 삶의 단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