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밤 – 남으로 간 친구의 귀환
열두 번째 날에는, 할머니의 둘째 동생 남한에 갔다 돌아온 형님이 아닌 또 다른 남한 이주 경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 가게에 할머니의 오랜 지인이 방문했는데, 그는 1970년대에 직접 한국에 건너갔다가 돌아온 분이었다. 할머니의 소개로 나는 그분의 이야기도 간단히 들었다.
“나는 1971년에 한국에 갔었지. 그때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는데, 캬… 빡빡하더구먼.” 지인은 오랜만에 젊은 날을 회상하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원래 남한 출신 부모를 두었고, 민단 활동을 하며 한국어도 유창했다. “한국에 가면 우리를 반겨줄 줄 알았지. 근데 공항에서부터 눈총 받더라고. 일본에서 왔다니까.” 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재일동포에 대한 미묘한 편견이 있었다. 일본에서 돈 벌어온 부자라는 시샘, 혹은 혹시 북한과 내통한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심 등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지인은 한국의 친척집에 몇 달 머물렀지만,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말은 통해도 문화가 너무 다르고… 내 나라가 맞나 싶더군.”
결정적으로 그는 군대 문제에 부딪혔다. 남한 국적을 선택한 재일교포 남성은 한국에 일정 기간 머물 경우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에 갑자기 군대 가라니… 난 일본서도 병역 없었는데.” 그는 고민 끝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다행히 영주권을 유지하고 있어서 귀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부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한국에 뿌리내리려다 병역 등으로 곤란을 겪은 경우도 있었다.
“돌아오고 보니 여기가 내 자리더군.” 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조차 온전한 환영을 받지 못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결국 난 재일교포일 뿐,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니란 걸 깨달았지.” 그의 말에 할머니도 조용히 공감했다. 둘째 동생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남으로 간 재일동포 상당수가 현지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온 현실은, 그들에게 일본이 기피해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고향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할머니는 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한국도 많이 달라졌다니, 나중에 한번 가보셔.” 사실 할머니 본인도 아직 한국 땅을 밟지 못했기에, 내심 동년배 친구가 다시 시도해 보길 바라는 눈치였다. 지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난 됐소. 지금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던데 뭘.”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부산에 사는 친척과 영상통화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이 변해 이제는 실시간으로 한국과 연락하고 얼굴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두 어르신은 신기해하며 화면 속 한국의 거리를 들여다보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재일동포와 조국의 관계도 변모했음을 느꼈다. 과거에는 멀기만 하던 고국이 기술과 교류의 발달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재일동포 정체성은 더욱 희미해져 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원하면 한국 사람이 될 수도, 일본에 동화될 수도 있는 시대. 그 속에서 1세대의 특별한 정체성(조선적)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