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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열세 번째 밤 – 조선학교의 아이들

by 나바드

열세 번째 밤, 할머니는 나를 특별한 곳으로 데려갔다. 평소 단골로 다니던 선술집이 아니라, 도쿄 교외에 있는 조선학교의 운동장이었다. 때마침 그날 저녁 학교에서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할머니는 동네 일본인 친구 몇과 함께 나를 거기로 안내했다.


운동장 한편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들이 전통 한복을 입고 나와서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북측 계열 학교이긴 했지만, 공연 내용은 아리랑 같은 한민족 공통의 민요와 전통무용이었다. “와아—” 객석에서는 한국 교포뿐 아니라 이웃 일본인들도 같이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할머니는 무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보기 좋네… 우리 애들 어릴 때 생각도 나고….” 그녀의 눈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나는 축제 구경을 마친 후 학교 교장 선생님과 짧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3세대 재일교포로, 자신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요즘 학생 수가 많이 줄었어요. 그래도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족의 얼을 잇는 일이니까요.” 그가 힘주어 말했다. 현재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조선학교들은 재정난과학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정부나 지자체 지원도 미미하고, 고등학교 무상교육 혜택에서도제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사명감으로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교육을 이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교장에게 다가가 “힘내주시오. 우리 애들 덕에 내가 산 보람 느끼네”라고 격려했다. 두 분은 잠시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할머니도 젊은 시절 약 2년간 이 학교 급식 조리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땐 우리도 가난해서 밥도 변변찮게 해줬는데, 요즘 애들은 뭐 먹나요?” 교장이 웃으며 “이젠 일본 학교랑 똑같이 잘 나옵니다. 그래도 가끔 김치랑 비빔밥도 해줍니다”라고 답했다. 모두 함께 웃음이 터졌다.


축제가 끝난 뒤, 우리는 학교 담벼락에 붙은 졸업생 사진들을 구경했다. 수십 년에 걸쳐 졸업생 수천 명의 얼굴이 빼곡했다. 할머니는 1960년대 졸업생 명단에서 자신의 큰딸 이름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깄 네, 우리 딸. 여기 나왔지….” 딸은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에 진학했으나, 결혼 후에는 평범한 일본인 주부로 살고 있다. 지금은 한국어도 많이 잊었지만, 그래도 모국가(애국가나 공화국가)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역시 학교 다닌 덕에 가슴 한구석엔 남아있나 봐.” 할머니는 뿌듯해했다.


이날 경험은 내게도 인상적이었다. 재일동포 사회가어떻게 다음 세대를 길러내고 있는지, 그 현장을 직접 본 것이다. 비록 학생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어가 더 익숙하겠지만, 학교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배우고 정체성에 긍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커서 일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될지 몰라도, 이 학교에서의 추억은 남을 것이다. 조선학교의 아이들은 할머니 세대의 유산이자, 미래로 전하는 다리가 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저 아이들이 우리 희망이야. 우리가 못 누린 걸 저 애들은 누리길 바라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새삼 활기가 돌았다. 평생 고된 삶 속에서도 후세를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온 어르신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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