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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열한 번째 밤 – 북으로 간 가족의 기억

by 나바드

“오늘은 내 동생 이야기 좀 더 해줄까…” 열한 번째 밤, 할머니는 다시 북송된 막냇동생에 대한 추억을 꺼냈다. 이전에 들은 대로, 그녀의 막냇동생은 1960년에 북으로 떠났다. 그리고 끝내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동생이 떠난 후 몇 년간 북한으로 편지를 부쳤다고 한다. 초기에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간간이 소식이 오가기도 했다. “처음 1~2년은 편지가 왔어. 잘 지낸다고, 애들도 학교 다닌다고… 근데 곧 끊기더라고.” 아마도 북송동포들의 열악한 처지를 북한 당국이 감추려 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1980년대에 이르러 북한의 실상이 외부에 조금씩 알려졌다. 귀국한 재일동포 출신들이 북한에서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증언도 나왔다. 조총련 내부에서도 환멸을 느끼고 탈퇴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제야 알았지. 우리 동생이 거기서 고생했겠구나… 괜한 데 보냈구나.” 할머니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이 그토록 폐쇄적이고 가혹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북송 사업을 주도했던 조총련마저도 1970년대 들어 북한 정권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회원 수도 급감했다.


“몇 해 전, 총련 통해서 내 동생 소식을 알아보려 했는데 결국 실패했어.” 할머니는 흐릿한 흑백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꼬마였던 막냇동생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있었다. “저렇게 환히 웃던 애가… 북에서 잘 살았을까? 아니면 굶어 죽었을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는 자신의 가족사가 재일조선인의 비극을 압축한다고 했다. 한 사람은 북으로, 한 사람은 남으로,자신은 일본에 남아… “우리가 다시 한 식탁에 둘러앉는 일은 영영 없었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기도했다. 나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분단과 이산의 상처는 이렇게 한 가정을 갈가리 찢어놓았고, 살아남은 자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과 죄책감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슬픔 속에서도 다짐했다. “동생들 몫까지 내가 기억하고 전할 거야. 우리가 왜 갈라져야 했는지,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이 기록을 통해 전하고 싶다고 했다. 북송된 수만 명의 재일동포들, 그 잊힌 삶들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어 내려갔다. 북으로 간 이들의 이야기는 한반도 분단사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의 장이기에, 반드시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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