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밤 – 차별과 저항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어요. 우리도 싸웠지.” 여덟 번째 날, 할머니는 재일조선인들의 인권투쟁과 저항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차별이 극심했던 만큼, 이에 맞선 움직임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재일조선인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48년 한신교육투쟁이 대표적이다. 미군정과 일본 정부가 조선인학교를 폐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오사카와 고베 등지에서 조선인 학부모와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사상자까지 발생했지만, 그 투쟁 덕에 조선학교 일부가 존속될 수 있었다. “그때 우리 같은 어른들도 도시락 싸들고 가서경찰하고 싸웠어. 안 그랬으면 우리 애들 학교도 문 닫을 뻔했다니까.” 할머니는 결연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로도 법적 권리 쟁취를 위한 소송과 집회가 이어졌다. 1960~70년대에는 조총련계 학교를 고등학교 학력으로 인정하라는 요구, 생활보호법을 조선인에게도 적용하라는 운동 등이 벌어졌다. 할머니는1970년대에 한창 지문날인 반대운동에 뛰어든 적이있다. 외국인 등록 때 지문 찍기를 거부하는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많은 조선인이 일부러 지문을 찍지 않아 벌금과 체포를 감수했다. “지문날인은 범죄자 대우하는 거라서 정말 치욕이었거든. 나중엔 일본 양심적인 사람들도 우리 편들어 줬어.” 이러한 압박 덕에 일본 정부는 1993년에 드디어 영주 외국인 지문날인 제도를 폐지했다. 40년에 걸친 투쟁 끝의 승리였다.
또 하나의 저항은 “본명 되찾기” 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자신의 한국 이름을 되찾아 부르자는 움직임이 젊은 재일동포 사이에서 일어났다. 일본으로귀화한 사람들조차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관행에 반대하여, 민단계 인사들까지 “나는 한국인이다”를 선언하며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1980년대부터는 이웃 일본인들에게 “다나카가 아니라 김 씨라고 불러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엔 어색해하더니, 이젠 동네에서 다들 나를 김 할머니라고 불러, 허허.”
그 결과,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사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지방 공무원 채용에서 국적 제한이 완화되어 일부 지자체에서는 조선인 출신 직원들이 채용되었다. 또 대학 등의 문턱도 낮아져 조선학교 출신 학생들이 일본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고, 기업에서도 실력 있는 동포들을 쓰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일본 국적법이 개정되어 어머니가 일본인이면 국적을 물려줄 수 있게 되어, 재일교포와 결혼한 일본인 여성 가정의 아이들이 국적 문제로 차별받는 일이 줄었다. 1987년에는 귀화해도 한국식 이름 사용을 허용하는 등 동포들의 요구가 반영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특별영주자 자격을 부여하여, 당시 거의 모든 재일동포들이 정식 영주권을 획득한 것이다. 이제는 강제퇴거 걱정 없이 일본에 영구 거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차별은 남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세상이 바뀌는 걸 눈으로 봤다”며 흐뭇해했다. “예전엔 우리 조선학교 교복 입은 애들이 길에서 돌 맞고 그랬는데, 요샌 일본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고… 격세지감이지.”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봤다. 가만히 있었다면 얻지 못했을 권리들을, 재일조선인들은 스스로 투쟁하여 쟁취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사회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제도도 변모해 갔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