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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여섯 번째 밤 – 생존을 위한 선택

by 나바드 Mar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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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밤 – 생존을 위한 선택


그런 세월을 어떻게 버티셨어요?” 여섯 번째 밤, 나는 문득 궁금했던 것을 여쭈었다. 온갖 차별과 박해 속에서도 할머니 세대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답했다.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 했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우선 먹고살기 위한 일을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섰다. 일본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자, 재일조선인들은 자신들만의 경제활동 영역을 개척했다. 예컨대, 많은 이들이 노점상을 시작했다. 할머니 부부도 한동안 재래시장에서 작은 야키이모(고구마) 노점을 운영했다. “새벽에 일어나 고구마 싣고 가서 구워 팔았지. 벌이는 시원찮았어도 내 장사니까 눈치 볼 건 없었거든.” 또 다른 이들은 재일조선인 거리에서 조그만 식당이나 가게를 열었다. 특히 한국식 음식점, 야키니쿠(불고기집) 등이 1960년대부터 곳곳에 생겨났다.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한국 음식은 재일교포들에게는 고향의 맛이자 생계수단이었다.


일부는 고철 수집이나 밀조주 제조, 밀수 등 비공식적 경제 활동에도 손을 댔다. “정직하게만 살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무슨 짓이든 했지…” 할머니는 주변에 폭력조직(야쿠자)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야쿠자의 상당수가 소외된 재일조선인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을 정도다. 또한 많은 조선인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일본인들이 즐기는 핀볼식 도박 게임인데, 1950년대 이후 붐이 일자 재일교포들이 이 업종을 대거 장악했다. “우리 친척도 파친코 가게 하나 했는데, 그나마 돈 좀 벌었어.” 사회가 자신들을 배척하자, 재일동포들은 서로를 고용하고 단골로 삼으며 ‘민족경제’라고 부를만한 자조적인 경제권을 만들어갔다. 할머니는 “일본인이 우릴 안 받아주니, 우린 우리끼리 살길을 찾은 거지”라고 회고했다.


다음으로 정체성에 대한 선택도 필요했다. 앞서 말한 이름 사용이 그 한 예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일본 국적을 취득(귀화)해버리는 사람도 나타났다. “아이 장래 때문에 일본 사람이 된 친구도 있었어. 그래야 차별 덜 받고 학교도 마음 놓고 다니니까….” 그러나 할머니와 그녀의 남편은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 되는 게 싫어서”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 세대에게 귀화는 민족을 버리는 배신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1950~60년대 1세대 재일조선인의 귀화율은 극히 낮았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겉으로만 일본에 동화되는 척하며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밖에 나갈 때 일본식 이름을 쓰고 일본어만 썼지만, 집에서는 가족들과 한국말(조선말)을 하고 김치에 밥을 먹었다. “마음까지 일본 될 순 없지 않나… 그래도 겉으로는 티 안 내려고 애썼어. 안 그러면 또 무슨 일 당할지 모르니.”


또 하나의 선택은 단체에 몸담는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동포들이 뭉쳐야 일본 사회에 맞설 힘이 생겼다.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재일한인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친북계 조총련이나 친남계 민단이었다. “아무 쪽에도 안 속하면 정보도 지원도 얻기 힘들었어. 그래서 다들 어디든 들어갔지.” 할머니는 한동안 민단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 그 덕에 한국에서 건너온 책도 보고, 한글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반면 남편은 친북 성향 친구의 권유로 조총련 활동을 도왔다. 부부가 서로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웃기지… 집에선 같이 살면서 밖에선 적(?) 편에 서 있었으니.” 다행히 심각한 불화로 번지진 않았지만, 어떤 가정은 정치적 입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살려고 참 많이도 굽혔지. 그래도 지킬 건 지켰다고 생각해.” 재일조선인 1세대들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생활방식을 놓고 여러 갈래 선택지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날 재일한인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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