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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일곱 번째 밤 – 총련과 민단

by 나바드




일곱 번째 밤 – 총련과 민단


일곱 번째 밤에는, 일본 내 두 한인 단체인 조총련(조선총련)과 민단(민주통신)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로 올랐다. 할머니 세대 재일조선인의 삶을 얘기하면서이 주제를 빼놓을 수 없었다. “자네, 총련이랑 민단이라고 들어봤나?”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 광복 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이 이념과 지향에 따라 갈라져 만든 두 개의 단체라는 것을 할머니의 회고담이 이어졌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들은 처음으로 조선인연맹(약칭 조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것은 이념적으로 좌익 성향이었지만 무엇보다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단체였다. “처음엔 다들 한마음이었어. 좌우를 떠나 우리 조선사람 뭉치자고 했지.”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고 한국전쟁까지 터지자, 재일조선인 사회 내부에서도 남쪽 정부를 지지하는 파와 북쪽 정권을 지지하는 파로 분열이 깊어졌다.


결국 1946년,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을 따로 세웠다. 한편 좌파 계열 조선인연맹은 일본 당국의 탄압을 받아 해산당했고, 그 후신 격으로 1955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 출범했다. 조총련은 북한을 사실상 대변하는 조직으로, 북한 정부의 재정 지원까지 받으며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50년대엔 열 명 중 아홉은 총련 쪽이었다” 할머니의 설명처럼, 당시 남한은 이승만 독재로 혼란하고 경제도 낙후되어 있어서, 많은 재일동포들이 상대적으로 북한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조총련과 민단의 대립은 때로는 폭력사태로도 번졌다. 거리에서 양측 단원들이 주먹다짐을 하는가 하면, 서로를 ‘반동’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우리같이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은 참 난감했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 왕따가 되고, 한쪽에 들면 다른 쪽에 미움받고….” 할머니는 그 시절 동포 사회 내의 내분이 더 뼈아팠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조총련과 민단은 각자의 방식으로 재일조선인을 도왔다. 조총련은 북한의 지원을 받아 민족학교를 세우고 장학금, 융자 사업 등을 펼쳤다. 가난한 동포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민단도 남한과 연결되어 남한여권 발급, 취업 알선 등을 해주었다. 할머니는 두 단체에 모두 친분이 있었기에 도움을 꽤 받았다고 했다. “민단에서 내 동생 남한 갈 배편도 알아봐 주고… 또 총련 친구가 내 딸 학교 보내줄 돈을 빌려주기도 했지.” 그녀는 이념보다 동포애가 앞섰던 사람들도 있었다며 미소 지었다.


일본 정부의 시선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당국은 반공주의 영향으로 한때 조총련을 탄압했고, 1965년 한일수교 이후로는 민단 측을 우대했다. 조총련은 북한의 대사관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일본 우익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70~80년대에 북한의 대일공작(일본인 납치 사건 등)이 드러나면서 조총련 소속 동포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 “김일성이 보낸 선물이라며 시계를 돌리고 자랑하던 이웃도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와서 조사하고 그랬어.” 반면 민단 계열 사람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 후 비교적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았다. 남한 정부가 일본 주재 공관(재일한국민단)을 통해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외풍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처지도 요동쳤다.


할머니는 “참 피곤한 세월이었지… 일본 안에서 또 남북 싸움을 해야 했으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총련과 민단이 있었기에 재일동포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도 있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만약 우릴 대변해 줄 단체 하나 없었다면, 다 뿔뿔이 흩어져 일본 속에 녹아버렸을 거야.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린 총련이나 민단을 통해 목소리를 냈지.” 결국 조총련과 민단은 분단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재일한인들에게 정치·사회적 구심점을 제공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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