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밤 – 분단의 상처
네 번째 밤 – 분단의 상처
“해방은 되었지만, 우린 갈라졌지….” 네 번째 날, 할머니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반도 분단이 자신의 삶에 남긴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50년,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땐 라디오로 들었는데, 가슴이 철렁하더군. 고향이 불바다가 된다는데…” 한국전쟁은 비록 일본 땅에서 벌어진 전쟁은 아니었지만,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마음에도 큰 비수를 꽂았다. 분단이 일시적일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남북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현실에 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도 남한파와 북한파로 갈라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그 무렵에 벌어진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내 동생 하나는 북한을 동경했고, 또 하나는 남한으로 가고 싶어 했어.” 할머니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6·25 전쟁 전후 혼란 속에서, 막내동생은 1950년대 후반 북한으로 ‘귀국’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재일조선인 사회에는 북측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컸다.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낫고, “지상낙원”이라는선전도 있었다. “가난하고 설움 받느니 차라리 우리를 받아주는 북으로 가겠다고 하더라고.” 1959년 말부터 조총련(당시 북측계 재일조선인 단체)의 주도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었고, 동생은 그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할머니는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배를 타러 니가타(新潟) 항까지 동생을 배웅하러 갔다고 했다. “북으로 향하는 배가 부둣가를 떠날 때, 우리 동생 얼굴이 보였는데… 손을 흐르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그 동생과는 일체의 소식이 끊겼다. 편지 한 장 제대로 오지 않았고, 북에 남은 가족의 생사는 평생 알 길이 없었다. 훗날 알게 된 바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교포는 9만3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폐쇄성과정권의 문제로 많은 귀국자들이 약속된 “낙원”이 아닌 가난과 탄압에 시달렸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도 없었다.
한편 둘째 동생은 남한에 가보겠다고 고집했다. 1965년이 되어 일본과 대한민국이 국교를 맺고 나서야, 재일한인들은 합법적으로 남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부산에 있는 먼 친척을 찾겠다고 한국으로 갔었어.” 그러나 남한 땅은 그에게도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식민지배와 전쟁 후유증으로 1960~70년대 남한은 군사독재 하에 가난하고 경직된 사회였고, 일본에서 온 교포인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심을 많이 받았지. 일본에서왔다고 하니까 혹시 북한간첩 아니냐고까지…” 결국 둘째 동생은 얼마 못 버티고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남으로 간 재일동포들도 현지인들의 냉대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할머니는 두 동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단이 낳은 비극이지… 우린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떠돌았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한 맺힌 아픔이 전해졌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져버린 탓에, 재일조선인들은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가족과 생이별하거나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할머니 개인에게도 분단은 가족의 분열과 상실로 남은 것이었다. “지금도 기도한다네. 내가 죽기 전에 우리 남북이 하나가 되는 걸 볼 수 있기를… 적어도 내 동생들이 서로 안부라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분단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온 그녀의 한숨이 밤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