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밤 – 조선적이라는 이유
다섯 번째 밤 – 조선적이라는 이유
다섯째 날에는, 할머니가 일본 사회에서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방 후 외국인이 된 재일조선인들에게 일본 사회는 차갑고도 높디높은 벽을 세웠다. “전에는 그래도 일본 국적이라고 겉으로는 동등하게 대했는데, 이젠 대놓고 우리더러 나가라 했지.” 할머니는 전후 일본인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 취업의 벽이 있었다. “남편이 취직하러 다녀봐도, 어딜 가나 ‘조센진은 안 뽑는다’고 했어.” 패전 직후 일본은 폐허 속에 실업자가 넘쳐났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좋은 일자리에 끼어들기 어려웠다. 특히 정부나 공공 부문 일자리는 아예 금지되었다. 1945년 이후 공무원 등 이른바 ‘일본인 직장’에서는 조선인을 배제하는 정책이 있었고 , 일반 회사들도 암암리에 조선인을 꺼렸다. 심지어 병원, 은행, 우체국 같은 곳에서는 조선인을 채용하지 않았고,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 자격시험 응시조차 제한받기도 했다. 할머니의 남편은 학력이 있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거절되자 큰 좌절을 겪었다.
집을 구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숙을 알아보러 다니면 주인들이 대놓고 ‘조센진은 안 된다’고 했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주인이 방을 안 내주거나 가게에서도 손님 받기를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한때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격인 이카이노(猪飼野) 지역에 조선인들이 모여사는 낡은 판잣집에서 지냈다. “다 같은 조선사람들끼리 모여 살았어. 그게 마음은 편했지. 일본 사람 눈치 안 봐도 되니까….” 그러나 그들만의 빈민촌 생활은 열악했고 가난했다. 일본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도 없었다.
또한 외국인등록증 지참과 지문날인 제도는 재일조선인을 지속적으로 옭아맸다. 일본 당국은 1955년부터 모든 외국인에게 지문날인을 의무화했고, 조선인들을 경찰서로 불러 지문을 찍게 했다. “범죄자도 아닌데 손가락마다 지문을 찍으라니, 그때 정말 수치스러웠어.” 할머니는 분통을 터뜨렸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조선인이라면 열 살이 넘으면 다 지문을 찍어야 했다. 이 지문날인 제도는 이후 재일동포들의 거센 반발을 사, 몇십 년 뒤에야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조선인들은 항상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니며 신분을 증명해야 했고, 주기적으로 구청이나 경찰서에서 지문을 새로 찍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이름도 마음대로 못 썼어.”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본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한국식 이름 대신 일본 이름을 써야 했다. 식민지 시절 강요당했던 창씨개명은 해방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오히려 해방 후에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일본식 통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김영희는 “나카무라 케이코” 같은 일본 이름으로 불렸다. 학교나 회사에서 한국 이름을 쓰면 놀림과 차별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역시 일본식 별명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다나카 하나에”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본명으론 취직도 집 얻기도 힘드니까 별수 없었지.” 그녀의 말에서 울분과 체념이 함께 느껴졌다.
이렇듯 조선적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녀와 동포들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를 감수해야 했다. 버스를 타면 “조센징 내려라”라고 욕설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고, 길거리에서 돌멩이를 맞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조센진”이라고 괴롭힘을 당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숨긴 채 살아야 했다. 할머니는 “그땐 우리끼리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우린 투명인간인가 보다’ 했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국적도 권리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받던 세월이 그녀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