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밤 – 전후 일본과 조선국적
세 번째 밤 – 전후 일본과 조선국적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해방 이후 할머니가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법적 지위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패전 전까지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서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해방이 되자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일본 정부와 연합군 점령당국은 1947년 외국인등록령을 통해 조선인과 대만인을 “임시 외국인”으로 분류했고, 이들의 등록 국적을 한반도의 미수복국가명인 ‘조선(朝鮮)’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할머니도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외국인”으로 등록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공식 포기하자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괄적으로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모국도, 국적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지.” 할머니는 그때의 허탈함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과는 수교조차 없었으므로, 귀화를 하지 않은 한 조선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법률상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다만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원하면 자신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변경 등록할 수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 가족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당시엔 국적 변경을 하지 않고 그대로 ‘조선적’으로 남았다. “남한이나 북한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웠거든… 통일될 줄 알았지. 모두들 곧 통일될 거라 믿었어.” 실제로 초기 재일조선인 사회의 다수는 한반도가 곧 하나로 합쳐질 거라는 기대 속에 굳이 남한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 오사카부에서 한 조선인에게 발급된 조선인등록증 (외국인 등록증). 해방 후 일본 정부는 일본에 남은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분류하여 이러한 등록증을 항상 휴대하도록 했다. 1950년 국적법 개정으로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일본인이 아니면 일본 국적을 부여하지 않게 되었고, 한국이나 북한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조선적 재일인들은 사실상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법적 지위 변화는 일상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우선 선거권을 잃었다. “해방 전까지 우리도 식민지 국민이지만 일본 국적이라 투표를 했거든. 그런데 1945년 말에 선거권을 박탈당했어.” 또한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차별이 본격화되었다. 1950년 제정된 일본 국적법은 일본인 아버지에게서만 국적을 물려받도록 해,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이조차 일본 국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세대에선 일본인과 결혼한 이들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일본인이어도 아버지가 조선사람이면 애들은 일본 국적을 못 얻었지.”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1952년 이후 조약 발효로 완전히 외국인이 되자, 취업이나 사회복지 측면에서 온갖 제약이 뒤따랐다.
“우리를 더는 자기네 국민이 아니라고 하니, 대놓고 차별이 시작됐어.” 할머니의 한마디에 당시 상황이 실감 났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국교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재일조선인을 처리하는 임시방편으로 ‘조선적’이라는 분류만 해놓았을 뿐,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주민으로서의 권리는커녕, 의무만 남았다. “세금은 똑같이 내는데, 건강보험이나 연금 혜택은 못 받기도 했어”라고 할머니는 회상했다. 실제로 1980년대까지도 재일조선인은 납세 의무는 지지만 각종 복지 혜택에서는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와 가족들은 해방 후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