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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두 번째 밤 – 해방과 남겨진 사람들

by 나바드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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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밤 – 해방과 남겨진 사람들


다음 날 밤, 나는 약속대로 선술집을 다시 찾았다. 할머니는 어제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해방 무렵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내 말에, 그녀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지. 그날을 난 잊을 수 없네…”


할머니는 당시 십 대 중반의 소녀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 온 그녀는 오사카 외곽의 공장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광복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몇몇은 집에서 손수 태극기를 그리고 만들어 창문에 내걸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모두 들떠 있었다. 실제로 일본에 있던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 중 대부분은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1, 2년 사이에 백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귀국길에 올랐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혼란스러운 패전 직후 일본 각지의 항구 예를 들어 큐슈의 하카타항 같은 곳에는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타려는 조선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많은 조선인들이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항구로 이동하고 있다. 패전부터 4개월 동안 약 13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연합군의 송환 프로그램을 통해 추가로 8만여 명이 송환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네 가족은 끝내 일본에 남기로 했다. “왜 돌아가지 않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할머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다. 첫째는 돈이 없어서였다. 전쟁으로 빈털터리가 된 이들에게 고향까지 가는 배편과 기차비용조차 큰 부담이었다고 한다. 둘째는 고향의 상황이 너무 불안해서였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권력 공백으로 인한 혼란이 일어났다. “일본에 남은 게 나아서가 아니라, 조선이 너무 위험하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문이 자자했지.” 실제로 일부는 어렵게 고향에 갔다가 실망하고 다시 일본으로 밀항해 돌아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셋째는 이미 일본에 자리 잡은 생활이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전쟁 전에 일본 회사에 취직해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 있었고, 남동생은 일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할머니의 아버지)은 ‘여기서 벌어 고향에 송금하자’며 더 머물자고 했어. 나도 어린 동생들도 다 여기 있었으니까.” 이렇게 하여 해방 이후에도 약 6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땅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 밤, 할머니는 해방의 환희와 동시에 찾아온 분단과 혼란에 대해 담담히 들려주었다. “광복은 되었지만, 우리 삶은 당장 나아지지 않았어…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려워졌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갈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아야 했던 조선인들의 사연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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