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밤 – 할머니를 만나다
첫 번째 밤 – 할머니를 만나다
부산에서 출장 온 나는 도쿄 변두리의 허름한 선술집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좁은 가게 안엔 퇴근 후 한 잔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중에는 작은 체구의 백발 할머니도 계셨다. 혼자 조용히 마주 앉게 된 우리는 자연스레 말을 섞었다. 할머니는 자신을 “조선국적(朝鮮籍)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순간 의아했지만 곧 깨달았다. 조선국적이란 한국(대한민국)이나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느 쪽 국적도 아닌, 일본에 오래 거주해 온 재한조선인들이 해방 후 취득하게 된 특이한 신분을 말한다. 일본 패전 후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일본에 남은 한인들은 한동안 공식 국적 없이 ‘조선’이라는 옛 이름으로 등록되었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은 현재까지도 법적으로 무국적에 가까운 조선적 신분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의 나이는 구십을 바라본다고 했다.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었지만 눈빛만은 단단했다. “조선적이라… 지금은 드물지요.” 내가 말하자,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드물지. 이젠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겪은 이야길 누가 알아줄까 했는데, 자네같이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고맙네.” 그녀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옛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선 짧은 인사와 자기소개에 그쳤지만, 할머니의 삶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내일부터 열흘간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느냐 청했다. 할머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살아온 날이 쓸모가 있다면, 기꺼이 들려주마” 하고 웃었다. 이렇게 해서 90세 조선적 할머니와 나의 10일간의 기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