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작가 Dec 08. 2023

"아버지는 제가 생각하는..."

아들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회사,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 야구팀들...

뭔 놈의 모임이 이렇게 많은지...

술자리 많은 연말. 위기 경보가 떴다.


안 가면 그만 아니겠냐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모임이 나 없으면 안 돌아간다는 게 문제다.

사실 나 하나 없어져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겠지만

지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믿는 지동설 학파라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갖고 술자리에 참석한다.


덕분에 그동안 아내에게 쌓아놓은 포인트는

이미 다 까먹은 듯하고

(쌓아놓은 포인트가 있었는지 확인된 바 없지만...)

조만간 다시 채울 생각으로 포인트를 가불하고 있다.

(이 마이너스 인생은 언제쯤 끝날까...)


어제 회식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집에 도착하니 모두 운동하러 가고 없었다.

아침에 아내가 (이 꽉 깨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술자리 참석하는 것까진 좋은데

윤이 수학은 좀 봐줬으면 좋겠어.

화장실 청소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학원 필요 없다, 아들 수학은 내가 책임지겠다,

화장실 청소도 내가 전담하겠다 큰소리를 쳤는데

요즘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나란 인간은 한 번씩 경고불이 들어와야 정신 차린다.


아침에 출근하며 윤이에게 말했다.


"윤이랑 아빠는 공동 운명체인 거 알지?

윤이가 잘해줘야 아빠도 계속 야구할 수 있다.

윤이도 편하고, 아빠도 편하고. 오케이? 잘해보자!"


지금이 포인트를 쌓을 기회였다.

목욕탕 아저씨처럼 팬티에 고무장갑만 낀 채

쪼그려 앉아 화장실 바닥과 변기를 닦았다.

술 먹고 와서 이러는 거 누가 보면 주사인 줄 알겠네...

누가 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

때마침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호~ 타이밍 좋고~ 복장 좋고~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침에 혼나더니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것 봐~

괜히 나 미안하라고~"


"에이~ 몰래 청소 끝내 놓을랬는데 걸렸네?

내가 화장실 청소는 계속 이렇게 몰래 했었어~"


"계속? 몰래? 웃기고 있네~"


웃기고 있단다. 웃겼으면 된 거다.

포인트를 조금 채운 느낌이다.


조금 있으니 태권도장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윤이는 기특하게도 샤워를 마치자마자

수학 문제집을 펴고 오늘 분량을 마무리했다.

채점을 매 주고 틀린 문제를 같이 풀었다.

포인트가 쪼금 더  것 다.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발견한 아내가 말했다.


"뭐야? 또 사 왔어? 난 안 먹을 거야.

어차피 내 술도 없어~"


'내 술도 없어'는 꼬시면 넘어온다는 거다.

회식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혹시 몰라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넣어놨는데 입질이 온 거다.


"저희 과자는요? 뭐 좀 먹을 거 없나?"


오호~ 오늘따라 손발이 잘 맞네~

아이들 과자를 사 오겠다는 명분으로 얼른 나가

소주도 한병 사와 아내용 하이볼을 제조했다.

(아내의 주종은 소주 하이볼~)


조촐하게 대화 분위기가 형성됐고

한잔씩 홀짝이며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아내와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의식의 흐름이 비슷해

관심 분야도 겹치고, 공감하는 부분도 많아

밤늦은 시간까지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포인트도 은근히 쌓이고 있겠지?


옆에서 영상 편집을 하던 윤이도

귀는 우리 쪽으로 열고 있었다.

우리 얘기를 듣고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내 아재개그에 엄지척을 해주기도 했다.


윤이는 연말에 제출할 학교 과제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보는 것~


기획할 때부터 윤이는 나와 의견을 많이 나눴다.

그때마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서로를 치켜세웠다.


"와~ 찢었다! 아버지는 진짜 천재예요!"


"지금까지 말한 걸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해? 윤이 진짜 천재 아니야?"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레이션에서부터 막혔다.

윤이는 자기 목소리가 나오는 게 싫었는지

기계음으로 내레이션을 넣었는데 딱딱하고 어색했다.

이번엔 내레이션 대신 배경음악과 자막을 넣었는데

작업도 어렵고 사람마다 자막 읽는 속도도 달라

집중력을 유지시키기 쉽지 않다며 고민에 빠졌다.


"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술 때문인지 오늘도 아이디어가 술술 나왔다.


"사람 목소리로 내레이션 하는 게 제일 좋은데...

내레이션에 어울리는 친구를 찾아보는 건 어때?

윤이는 이 영상을 만드는 감독이야.

그런데 감독이 모든 걸 다 할 필요는 없어.

잘 어울리는 사람을 캐스팅해서 연출 의도에 맞게

이끌어 가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거든.

어울릴 만한 친구를 캐스팅해서 잘 뽑아내봐~"


방금까지 괴로워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던 윤이는

내 말을 듣고 한줄기 빛을 찾은 듯 화색이 돌았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고서~

드디어 잠자리에 들 시간.

윤이는 완벽한 하루에 화룡점정을 찍는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어른인 것 같아요.

짜식이 예고도 없이 한방에 훅 들어오네~

어느 대목에서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엔 묻지 않는 게 이상적일 듯하다.


술엔 안 취했는데 이 한마디엔 취하네~

이 기분 좋은 숙취는 꽤 오래 갈 것 같았다.


나도 윤이를 꼭 안아주며 화답했다.


윤이도 아빠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들이야.


이상적인 것 같기도, 이상한 것 같기도 한

부자의 포옹을 보는 아내의 표정이 묘했다.


감동받은 것 같기도, 서운한 것 같기도...


우리 공동 운명체는 어떻게 되는 거지?

포인트가 쌓인 것 같기도, 깎인 것 같기도...

매거진의 이전글 재물운이 시작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