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다이어리를 펼친다.
첫 글자를,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는 몰랐는데 쓰다 보니까 글자가 글자를 낳고, 문장이 문장을 낳는다. 친구에게 화풀이하듯, 하소연하듯 길어지는 문장들과 이야기들이 언제 이렇게 글을 잘 썼는지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 글자를 배열해간다. 한 페이지만 쓰려고 했는데, 크지 않은 다이어리에 지금까지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더니 아직 쓸 말이 남았는데 어느새 두 페이지째 일기를 쓴다. 마구 쏟아내던 감정들의 파도가 해변가에 마침내 도달해 소멸해 스르르 사라져갔다.
감정이 사라져가면서 쓸 말도 없어졌다.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쓰기 시작한 마음도 있었는데 쓰다 보니 실패! 괜히 이성적인 척하려는 것보다는 그냥 쏟아내고 후련해지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성적인 척 감정을 정리하려다 되레 감정을 쏟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약간의 아쉬운 감정이 남는다. 하지만 이를 또다시 정리해서 일기를 쓴다? 그건, 이순신 장군쯤은 되어야 명료하고 깔끔하게 일기를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감정을 쏟아낸 일기는 나중에 읽었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데 이상하게 그때 그 감정이 되살아나 분노가 반복된다.. 마치 화를 부르는 영화를 다시 보기 하는 느낌이랄까, 그때의 후련한 마음을 간직하기보다 그 순간의 분노와 슬픔 이런 것들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잘 안 보려고 하지만, 가끔 일기장을 들여다보면서 0월 0일의 하루는 어땠는지 기억하는 게 재미있어서 혼자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어서 안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오래된 다이어리를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