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성질이 문제 되는 것만큼 절망적인 게 있을까. 숫기가 없고, 언변은 그럭저럭이며, 먼저 다가가지 않는 고양이 같은 내 성격이 나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매력을 쥐어짜 보여주면 됐고, 나쁘지 않게 간택을 당해 나름의 자부심도 있던 터다. 자만추가 불가능한 퀴어 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진.
게이가 되고 난 직후 퀴어 지인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이 복잡하고 지난한 문제를 혼자만 안고 있기엔 무척 막막하니까. 하지만 애초에 넓은 관계를 선호하지 않았고 소중한 친구들도 겨우 지키고 있는 마당에 여분의 관계는 부담으로 느껴졌다. 퀴어라는 사실이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하지만, 오직 그 이유만으로 다가가기엔 동기가 약해 보이기도 했다. 관계란 다양한 관심사를 공유하며 발전하는 것이니까. 그래, 이미 좋은 친구들이 차고 넘치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점점 게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에 대한 열망은 커져가고 향유하는 콘텐츠가 자연스럽게 퀴어 관련 문화로 바뀌었다. 커밍아웃을 한 지인도 적고 그들이 세세한문화까지 다 알고 공감하기는 어렵기에, 나는 '퀴어한 대화들'에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지속됐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친구든 애인이든 만들어야 할 때. 두 눈을 질끈 감고 틴더를 깔았다.
사진을 업로드 하세요. 인스타그램에선 별생각 없이 지나친 이 문장이 너무 무서웠다. 만남 어플은 말 그대로 그들이 사는 세상 같았고 내가 '그들'이 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랄까. 나는 타협안으로 예쁜 얼굴 말고 예쁜 풍경 사진을 걸어놓고 다른 사람들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그러니까 이 많은 남자들이 다 게이라고? 되게 일반인 같은데....... (맞다) 무한에 가까운 게이들의 프로필. 클릭 한 번에 살면서 처음 본 남자들의 외모, 취향, 가치관 따위의 정보가 쏟아졌다. 마음에 안 들면 왼쪽으로 nope, 마음에 들면 오른쪽으로 like, 미치게 마음에 들면 위로 super like. 방향을 헷갈리지 않게 유의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죄송한데 취향이 아니네요, nope. 잘 생겼는데 제가 준비가 안 됐어요, nope. nope, nope, nope... 조심스러웠던 손가락은 단 며칠 만에 가벼운 밸런스 게임을 하듯 무심히 남자들을 쳐내고 있었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틴더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건, 그러니까 얼굴 사진을 올리고 like를 누르기 시작한 건 친누나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끼)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랑에 목이 말라 이틀에 한 번꼴로 소개팅을 나가고 하루에 두 탕을 뛰는 날도 허다하다는 커밍아웃을 했다. 그러면서 눈치는 보였는지, 자기는 그리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며 많은 지인이 소개팅에 사력을 쏟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다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성애자도 지인이나 결혼 정보 회사를 통해 미친 듯이 만남을 하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형태와 플랫폼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거구나. 그냥 다들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구나! 타인의 도움 없이 각고의 자기 PR을 하며 만남을 고대하는 퀴어들이 도리어 장하게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용기가 솟구쳤고, 피를 나눈 가족이니만큼 누나처럼 열심히 남자를 만나보리라 다짐했다.
사진을 업로드 하세요.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나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 사진을 엄선해서 올렸다. 그렇게 나는 틴더 세상의 어엿한 주민이 되었다. 외로운 도시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는 반딧불이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물론 갑자기 낭만적인 미래가 펼쳐진 건 아니었다. 누구는 면접관 마냥 조건을 따지고, 누구는 공작새처럼 부담스러운 옷을 입고, 누구는 느낌이 쎄하고, 누구는 끼 있는 사람은 싫다고 하고. 또 다시 이어지는 nope, nope, nope... 좋아요 한 번 누르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하기야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이 모양이겠지.
친구를 만들어줄 것 같았던 틴더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진 못했지만,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지에 대한 취향만큼은 확실히 만들어줬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 낫고 별로인지를 이토록 많이, 빠르게 판단했던 적이 없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무엇이든 괜찮았고,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싫은 건 딱히 없었다. 사람에 관해서라면 더 강박적으로 평가하기를 거부했다. 조금은 나르시스트적인 감각으로 모든 것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싶었다.
둥근 돌멩이 같았던 나는 틴더를 거치며뾰족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무엇에 이끌리는지 예민하게 감각하고,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들엔 눈을 감았다. 본인만의 선호를 제련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쟁취하지 못하고 외로워지는 세계이니까. 도저히 원하는 바가 나타나지 않으면 발품을 팔아 관련 커뮤니티들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게 취향을 만들고 좇는 시간이 쌓여갔다. 그러면서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된 사실이 있다. 지금의 시야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나와 비슷한 리듬과 템포로 춤추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누구의 말처럼 세상은 넓고 그만큼 사람은 다양하다는 것.
사실 혼자 남을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이런 이상한 나를 품을 수 있는 곳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어디든 무리 없이 속할 수 있는 민둥민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뾰족해지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나는 지금은 안다. 무슨 모양의 나든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어디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모난 부분이 있어야지만 톱니바퀴처럼 다른 것들과 맞물릴 수 있다. 둥글하고 매끈한 건 고상해 보일지 몰라도 모든 것들로부터 미끄러진다. 붙잡을 수 있는 손이 없어지고 필연적으로 외로워진다. 살아가기 위해선, 애써 첨예하고 선명해져야 하는 것 같다. 나에게 분명히 할당된 몫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잔인함을 품어야 하는 것 같다. 어떤 공간에 속하고 어떤 공간을 거부할 것인가. 결국 존중되어야 할 선택의 기준은 그것밖에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