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핵심적인 정체성은 비밀이다. 속에 있는 것을 쉽사리 꺼내 보이는 법이 없으며 혼자 소화하고 배설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자신의 말이 어떤 기쁨을 선사할지 보다 어떤 논란과 불화를 일으킬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의 운명은 그렇다. 긴장 상태가 숨 쉬듯 자연스러워지면, 실은 더없이 사소한 것들에도 전전긍긍해진다. 어느새 말했을 때의 불안감보다 말하지 않았을 때의 답답함이 더 편안해진다. 그렇게 입을 다무는 게 익숙해진다. 가까워지는 게 불편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그러니까 말하기보다 듣기가 익숙한 이들에게 이끌린다. 그들은 당신에겐 뭐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고민과 취향 따위를 털어놓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요청한다. 당신의 말도 들려달라고. 무척 감사하고 송구한 일이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우리의 거리는 쌍방으로 좁혀졌다기엔 당신쪽으로 기형적이게 쏠려있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 선천과 후천 모두 겁쟁이인 내게 당신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르고요. 사실 당신이 다가오는 동안 나를 수용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평가하고 있었어요. 당신보다 더 크고 어려운 비밀을 갖고 있다는 기만을 갖고 평가질을 했습니다. 그 못난 우월감이 싫어서 실은 진작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 대상도 모른 채 은폐하는 행위만 남은 것 같다. 내 생활은 온전히 내 안에서만 지켜졌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은 부모님에게 가까운 지인의 이름과 성격, 어떤 활동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지 따위를 말한다고 했다. 그분들 중엔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나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들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친구들의 이름은 고사하고 내가 대학교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부모님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 쉽사리 속 얘기를 꺼내놓지 않는 내게 S가 했던 말이다. 나와 그녀 모두 서로에게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어떤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스몰토크를 담당하는 뇌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서 산책을 하고, 아이돌 얘기를 하고, 마이너한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작가를 소개하고, 감수성이 부족한 친구를 욕하고, 여성혐오에 환멸을 느끼고, 퀴어를 말하고, 벅찬 인생 얘기를 나누고, 우울에 관해 논한다. 항상 먼저 입을 떼는 S는 불만이 가득해 보이지만, '무거운' 이야기들을 가볍고 재밌게 나눌 상대가 필요한 우리는 관계의 불균형 속에서도 서로를 찾는다.
어디에서의 일상은 어디에서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S와의 만남에서 자주 깨우친다. 세계의 경계는 비밀이 되어야 하는 곳과 비밀이 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막역한 S와 나 사이에도 그런 경계선이 그어져 있을 거란 사실을 떠올리면 매번 슬퍼진다. 그녀도 심연 속 어딘가에 결코 내놓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아니 그때가 와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영혼의 무게라는 건 말해지지 못한 비밀의 무게는 아닐까.
어쩌면 관계의 친밀도라는 건, 비밀을 말하는 행위 자체보다 비밀을 말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간직하는 데서 높아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적어도 너에게만큼은 나의 비밀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란 한 줌의 희망. 그 희망을 놓을 수 없어서 비밀은 지켜져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마음은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으면 내 안에서조차 산산조각이 나니까.
누군가의 비밀이 궁금하다. 당신은 왜 그것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묻고 싶다. 그동안 눈을 떼지 않고 견고하게 응시하고 싶다. 그리곤 어떻게든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싶다. 구릿하고 찌질하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래서 더 재밌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고 싶다. 그렇게 비밀에 날개를 붙여 자기만의 둥지로 날아가도록 만들어주고 싶다. 비밀로 완전무장한 우리는 어느새 나체가 되고, 그 부끄러움을 잊어버릴 정도로 많은 나체를 마주하고 싶다.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르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여전히 무거운 영혼을 짊어지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