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와 대전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서울이라는 쳇바퀴 속에서 뛰고 있는 건지 나뒹굴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요즘이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발을 움직여야 했고 주변엔 똑같은 처지의 햄스터들이 포진해 있었다. 영원히 달리거나, 영원히 멈추거나. 오직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것 같은 서울에서 S는 영원히 달리는 방향으로, 나는 영원히 멈추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든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닌지라 우리는 함께 극단에서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대전은 광역시임에도 서울보다 행인이 없었다. 서울이 특별시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초초초초초광역시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사람만 줄어도 살 것 같네. 사람의 온기는 생각보다 높아서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는 것 같아. 사실 이곳도 지루한 쳇바퀴이기는 매한가지일 텐데 그래도 선선한 바람은 불잖아. 인구밀도와 행복도의 상관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적한' 거리를 보며 생각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사람이 적은 장소 위주로 여행코스가 세워졌다. 도심 외곽의 미술관, 박물관이나 공원 같은 곳. 목적지 중 하나인 한밭수목원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감탄했다. 가을빛을 충만히 머금은 공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고 풀은 바스락거렸다. 홀린 듯 잔디밭 한 자락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넓은 침대를 사고 처음으로 누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S는 늘 그렇듯 좋아하는 노래를 틀며 보석함 속 가수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밴드, 진짜야. '라쿠나'라는 밴드의 노래가 어느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귀에 들어오는 한 구절.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건 사랑과 지구의 종말밖엔 없다고 널 보면 난 믿을 수 있어
미쳤지, 공감해? S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히.
S와 나는 짧은 연애를 한 적 있다. 가까운 이웃이었던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이 되고나서 급격히 친해졌다. 대여섯 명 정도 무리를 지어 쉬는 시간마다 놀았고 돌이켜보면 웃기지도 않은 사소한 일들에 꺄르륵거리며 우정을 쌓았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우리의 모습은 여전했고 야자가 끝난 후 같이 하교하는 날이 드문드문 늘어났다.
그때의 우리는 일찍부터 직감했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너에게는 더 많은 걸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꽤 오랜 삶의 동반자가 될 것 같다는 걸. 10년이 지난 지금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기에 직감이란 이다지도 날카롭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금에서야 우리(게이와 여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언어를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남성-여성 관계의 종착지는 연애가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더 깊고 진한 시간을 내어주지만 영원한 끝을 담보하는 연애. 그 미지의 가능성은 기대되는 만큼 두려웠고 우리는 사랑 대신 안전한 우정을 택했다.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갓 스무 살이 된 우리는 취기를 빌려 서로의 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너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거란 낭만적인 확신. 자연스럽게 우리의 연애가 시작됐다. 몽글몽글한 청소년 로맨스처럼 시작한 만남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나 때문이었다. 사귀기로 하면 더 말랑해질 것 같았던 마음은 왜인지 굳어졌다. 나 분명히 이 친구를 좋아하는데. 당황했다. 친구로 지낸 세월이 길어 연인으로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그래, 너무 다급해지지 말자. 나아질 거야.
안타깝게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S와의 관계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명명된 순간부터 묘한 불화감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지금 손을 잡아야 하나, 뽀뽀를 해야 하나.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완전히 아노미 상태에 빠진 나는 S와의 연락을 줄였다. 항상 그래왔듯 어려운 일 앞에서 도망을 택했다.
우리가 지내온 시간 중 어느 때보다 미적지근한 한 달이 지나고 S는 화를 냈다. 새로운 관계가 어색할 수 있지만 지금 너의 태도는 연인이 아니어도 문제적이라고.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내 마음을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내가 말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고 싶은)이었다. 서로를 잃기 싫다는 마음만은 분명히 같았던 우리는 결국 연인으로서 종지부를 찍고 친구로 돌아갔다. 한순간의 해프닝이었다는 것처럼.
S와는 지금까지도 그 시기에 관해 대화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모르겠으나, 나에겐 꽤 거대하고 긴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으로 각인됐다. 너무나 명확하게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그녀와 사귀고도 왜 내 마음은 딱딱했을까. 매번 머리를 쥐어짜도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사랑을 하지 못한다. 나는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전언이 마음 한 가운데 선명하고 깊게 새겨졌다. 강력한 저주 같았다.
대학교에 가선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들을 강박적으로 쳐내 왔다. 은근히 호감을 표시하는 친구에게도, 술을 먹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음을 물어본 친구에게도, 고백을 한 친구에게도. 그럴 때마다 사랑할 수 없다는 믿음은 강력해졌다. 인생에서 사랑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애초에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저주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산산조각났다. 군대에서 만난 T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