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떤 공간이든 편안히 녹아든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하는 탓이다. 나는 지금의 행복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행에 더 큰 신경을 쏟는다. 즐거움은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는 찰나의 산물이고 그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상실감도 배가 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기 충족적인 예언도 실행하며 나는 행복 비스무리한 것들과 거리를 둔다. 쓸쓸한 습관이지만 강력히 체화된 믿음은 의지를 갖는다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도망자의 자아를 가져서 그런 걸까.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특히 퀴어가 주인공인)엔 항상 연인들의 도피 장면이 있었다 무서운 적의, 날 선 평가, 공허한 대화, 끈적이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연인들을 보면 어김없이 사랑이 느껴졌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지 못하는 게 너뿐만이 아니라고, 너만 불행할 운명에 처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지난한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는 존재들의 생명력, 희미하지만 굉장한 내공의 정신력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처연한 위로가 되었다.
그들에겐 복잡다단한 세상이 아닌 오직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떤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오직 자기들만이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비밀스러운 규칙. 나는 그 속에서만 지을 수 있는 온전한 표정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J는 그런 의미에서 나를 사랑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던 남자다. 나는 종종 사람을 '들떠있는 부류'와 '들떠있지 않은 부류'로 구분하곤 한다. 핵심 감정이 밝음으로 채워진 사람들에겐 특유의 들뜸이 있다. 대개 세상에 대한 흥미가 가득하고 도망치기보단 소속되려는 경향의 소유자다. 나는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곤 하는데, 본의 아니게 그들을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나면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서로의 에너지가 충돌하지 않게 애를 썼다.
만남 어플에서 연락이 닿은 J를 처음 봤던 날, 그가 들뜬 사람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부담스럽기도 부럽기도 한 그의 성질. 서로가 쉽게 융화되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거리를 뒀는데, 걱정과는 달리 웃음과 휴식의 코드가 잘 맞았고 대화도 곧잘 통했다. 빅데이터로 추론했을 때 나와 J는 불행한 결말이 기정사실화 된 조합이었으나, 이정도로 죽이 맞는다면 또 모른다는 기대가 차올랐다. 으레 그렇듯 불확실한 가능성에서 연애를 시작했다.
사랑(혹은 콩깍지)은 대단해서 모든 기우를 뛰어넘은 좋은 날들이 이어졌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밝아졌고 내 안의 추적함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교환한다는 건 효과를 알 수 없는 강력한 마법을 부리는 것과 같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부푼 마음의 크기만큼 몸까지 주고 받으면 좋으련만 이 땅의 퀴어에게 스킨십은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다.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손을 꽉 붙잡고 포옹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우정의 상징에 가까워 보이는) 어깨동무만을 유일한 야외 스킨십으로 타협했다.
그쯤부터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다른 남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동지들.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J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들러붙는 세계의 규칙이 무겁고 지겨웠다. 둘만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기숙사에 살았고 J는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J의 누나는 직장인이라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는 빈 집과 다름 없었다. 거기에 평일 이틀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스케줄이었고 우리의 거리는 고작 30분 남짓. 더할나위가 없었다. J의 방에서 온종일 뒹굴거리는 상상을 했다. 억누르지 않는, 느낌 그대로의 사랑하는 얼굴로 마주보는 우리가 벌써 애틋했다.
당장 집에 초대해달랐고 졸랐다. 며칠 뒤 (멋대로 지정한) 아지트에서 우리는 편안히 장난을 치고 손을 잡고 배에 눕고 키스를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만해졌다. 그리 넓지 않은 이 방이 온 세상의 전부여도 괜찮게 느껴졌다. 퀴어 커플의 행복도와 자취방의 유무가 높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걸 이 때 알게 됐다.
행복에 겨워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내게 J는 카페에 가자고 했다. 한 장소에 2시간 정도 머물면 지겨워진다면서. 내가 있어도 지겨운가. 나와 함께면 어디든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와 함께면 어디든 즐거울테니 대수롭지 않았다. 그때는 그의 '들뜸력'을 가늠하지 못했다.
J는 생각보다도 더 용맹한 모험가였다. 매번 새로운 장소에 가고 싶어했고, 자기 동네에서도 구석구석 숨어있는 카페와 식당을 새로이 찾아 들어갔다. 전시와 뮤지컬은 한 달에 두 번은 가야 직성이 풀렸다. 내향인이라면서 사람 많은 곳에서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모종의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그와의 모험이 흥미로웠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원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던 나는 서울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었고, 퍽퍽한 대도시에도 아름다운 공간들이 숨어있단 걸 알게 됐으니까.
문제는 J가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데 있었다. 불편한 시선에서 도망치지 않고 연인과 이곳저곳을 정복하며 세상에 녹아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미소짓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기개를 가진 그에게 집에서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서운함이 쌓이기 시작했다. 포옹도, 키스도, 섹스도, 하다 못해 손 잡기나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나눴는데 그는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단둘이 있지 않고는 사랑한다는 말과 표정과 몸짓을 지어보일 수 없는데 그것들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너의 사랑한다는 언어는 이게 전부인 것인가. 나는 아직도 이렇게 허기진데. 마음의 핵심을 억눌러야 하는 공간에만 있던 오늘의 우리가 사랑을 나눴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의문은 숱하게 쌓여갔지만, 나는 어느새 J가 가진 사랑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다. 파리지옥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죄책감이 어김없이 작동한 것이다. 자연히 단둘이, 편히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실내에서 만나는 횟수가 줄은 만큼 스킨십도 줄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빈도도 줄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조금씩 시들어갔다. 꼭 필요한 영양분을 받지 못하고 잉여의 부산물만을 제공받는 것 같았다. 핵심이 없다면 나머지는 무의미했다.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예상했지만, 예상했다는 사실이 고통을 감면시켜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망이 사랑이라고 믿는 나, 소속이 사랑이라고 믿는 J는 계속 충돌했고 자연히 헤어졌다. 그가 가진 사랑은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동일한 양을 제공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심심한 성질인 것 같았다. 그 미적지근함이 나에겐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온도였거나, 가질 수 없는 그의 무던함이 질투났거나, 내 믿음처럼 도망만이 사랑의 동의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멀어져야 했다.
항상 그래왔듯 연애가 끝난 후 자책했다. 이번에도 사랑에 실패했다고.
실패. 누구보다 안정적인 사랑을 바라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패. 아슬하고 위태로운 것이 더 사랑에 가깝다고 믿는 실패.
그런 자책 속에 한없이 침잠했다.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불안정함이야말로 나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란 씁쓸한 사실을 수긍하는 것이었다. 떠나고 싶은 사람. 어딘지는 몰라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험가가 아닌 방랑자의 마음을 품은 사람. 타고나기를 부유해야 하는 사람. 결국 그들이 나를 떠받친다는 사실을 선명히 되새기는 것이었다.
'진짜 사랑'이란 게 있다면 나의 그것과 얼마나 닮아있을지 모르겠다. 이 뒤틀린 모양의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역시 뒤틀려버린 누군가와 한껏 도망치고 싶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어떤 곳으로, 오직 둘만의 체온이 있는 어떤 곳으로. 그곳에서 서로의 불안과 사랑을 맘껏 들키고 싶다. 적나라할 정도로. 그럴 때야 나는 비로소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그제서야 진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안정된 사랑이란 그렇게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