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를 만난 건 자대에 배치를 받고 나서였다. 낯선 환경에서 업무와 사람에 익숙해지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달팠다. 부대 경계에 있는 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색하는 단순노동이었지만, 여러모로 신경 쓸 사항이 많아 실수가 다발하는 업무였다. 코로나로 휴가가 전면 통제되어 예민해진 선임들에게 미숙한 후임들은 분풀이 대상으로 적합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으름장과 따가운 눈치가 쏟아졌다. 긴장되는 업무의 연속. 그 와중에 죄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의 이름, 기수, 계급, 소속 따위를 외어야 했기에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전쟁터 같은 곳에도 낙천적인 사람은 존재하는 법인가. T는 나보다 8개월 일찍 군생활을 시작한 선임이었다. 그 역시 화를 내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빈도가 낮고 다른 이들처럼 열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위에서 화를 내라고 하니 화를 낼 뿐, 부대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그에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피해만 없으면 후임이 탈영을 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것에 무심한 그는 왜인지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 나와 같이 업무를 하고 싶다며 조를 잘 편성해달라고 분대장에게 로비를 했고, 단 둘이 있을 땐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도 했다. 아직 모든 게 낯설었던 나는 그의 편애가 좋으면서도 얼떨떨했다. 별다른 얘기도 안 했는데 뭘 알고 나를 예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부대 환경에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였으니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정체 모를 애정 속에 석 달 정도가 흘렀다. 아직 '짬'이 낮았던 나는 남들과 있을 땐 T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했지만 단둘이 있을 땐 반말을 썼다. 특별한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 시간만이 유일하게 긴장을 풀 수 있었던, 조금 더 나다워질 수 있었던 순간이었고 그 자유가 더없이 소중했다. 그와의 밀회는 어떤 유희였고, 해방이었고, 묘한 긴장이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시간은 그런 긴장과 이완의 반복 속에서 두터워졌다.
어느 날 T는 나를 자신의 생활관으로 불렀다. 생활관은 작은 1인용 침대와 관물대가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방이었다. 제 몸 하나 뉘기도 시원찮은 침대에 앉아 있던 그는 어서 옆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앉자마자 <스카이 캐슬>을 아냐고, 모르면 무조건 봐야 한다며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드라마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한국식 사교육이 빚어내는 디스토피아의 향연에 금방 정신이 홀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옆에서 스카이 캐슬을 봤고 다른 드라마도 병렬 시청했다. 그가 유독 나를 아낀다는 걸 아는 선임들은 내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쌍이 되었고 둘이 보내는 시간은 거대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날도 T는 어김없이 나를 생활관에 불렀다. 아침 일찍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티비를 볼 수도 떠들 수도 없는데 왜 불렀지 싶었지만, 습관처럼 좁은 침대에 올랐다. 별달리 할 게 없는 우리는 너나 할 거 없이 나란히 누웠다. 그의 팔과 다리가 내 몸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스킨십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드라마를 섭렵하며 좁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자세를 해 본 우리였다. 다만 나와 T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묘한 시선. 그로부터 발생하는 은은한 긴장이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순간 어떤 충동이 올라왔다. 당장 고개를 돌려서 이 사람의 얼굴을 마주 봐야겠다는. 그것은 정말 충동이라고 할만큼 맥락 없이 튀어나온 감정이었다. 동시에 이성도 제 역할을 했다. 여기는 군대고, 이 사람은 선임이고, 나를 아끼지만 얼굴을 맞댄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심장의 박동이 강력히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고 속이 메스꺼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정체모를 긴장을 멈추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나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했다. 곧 그의 고개도 나에게로 향했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우리의 눈은 서로를 담고 있었다.
뽀뽀해 줘. 결코 머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다. 당황했지만, 이내 기대했다. 조금의 정적이 있고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기분 좋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내 안에 부재한다고 확신했던 무언가가 선명히 깨어났음을 느꼈다. 너무나 선연한 감각이어서 몸이 흠칫거릴 정도였다. 상투적인 표현처럼 모든 배경이 사라지고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 나의 형체가 확실해진 느낌이 들었다. 입술은 계속 맞닿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각본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이후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새벽, 아무도 없는 방을 찾아 들어가 다시 입을 맞춘 장면만이 선명하다. 입을 맞추는 동안 내 영혼의 일부가 그에게로 흘러갔는지 갑자기 속의 이야기들이 새어 나왔다. 어떤 과거가 있었고, 무슨 아픔을 무서워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왜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묵묵히 나의 말을 들었다. 그리곤 답했다. 자기에겐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고. 그것을 말할 때의 선한 눈망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불가항적으로 키스했다. 무릎 위에 올라타 계속해서 입을 물었다.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새벽의 짙은 어스름이 사라지고 밝은 하늘이 드리울 때까지. 우리를 빼고 멈춰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나 움직일 때까지.
서로가 없이는 못 사는 애틋한 동거가 시작됐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동자는 그 속내를 감출 수 없어서 우리가 게이라는 사실은 곧 기정사실이 됐고 많은 모욕과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그때 나는 스스로를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무척 아팠지만, 공통의 시련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하지만 폭발적인 화력이란 그것이 몸붙이고 있는 물체를 빠르게 태워 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가 전역할 때쯤 나의 마음은 어떤 불씨도 타오를 수 없을만큼 소진되어 있었다. 게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T는 지독한 이성애자였고 철이 없었으며 개념도 밥 말아먹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게 부끄러워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에서는 상종도 하지 않을 하찮은 남자 정도로 말하고 싶다) 그를 알아갈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었지만 마음만은 뜨거워 어김없이 키스를 했다. 그가 아무리 한심한 짓을 해도 그날 보여준 깊은 눈을 떠올리면 모든 게 잊혀졌으니 별 수 없었다. 그 거대한 호수, 아득한 심연은 대체 불가한 무엇이었다.
딱할 정도의 한심함과 아득할 정도의 눈빛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다만 그가 봉인된 사랑을 해방시킨 열쇠였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 살아있음이란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사랑은 미추와 별개로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는 걸 그때 알 수 있었으니까.
S, 네가 들려준 노래와 질문. 그 짧은 순간 나의 두 첫사랑이 스쳐지나갔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덕분에 내 몸이 사랑을 연료 삼을 때만 생생히 움직인다는 걸 알았어. 그것이 아무리 추하고 지독할지라도, 지구의 종말처럼 파괴적일지라도. 그것만이 지루한 쳇바퀴 속에서 영원히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었던 거야.
짧은 대답을 하곤 따스한 햇살 아래 누웠다. S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누웠다. 그녀가 여전히 내 옆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기뻤다. 사랑을 좀 더 세밀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는 지금, 그녀와의 연애에 낙담했던 순간을 돌이키면 결국 애틋해진다. 형태와 방향을 알지 못해 헷갈렸을 뿐 사랑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더 많은 걸 이해하고 새로운 사랑을 쓰고 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사랑도 응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꺼진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