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게이가 되고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나는 진보적일 것이라는 믿음. 더 정확히는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진보와 보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퀴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니까. 특정한 생각을 고수할 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여기며 외면하곤 한다. 나는 내면의 '진보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꿈틀거릴 때마다 혼란 속에 채찍질했고, 보수는 미완의 상태이며 결국 진보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교조적인 암시를 되뇌었다.
성별 이분법에 치를 떨면서 또 다른 이분법적 사고에 갇힌 꼴이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났다. 세계는 단일한 기준 따위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한 명의 인간조차 모순적인 사념들이 뒤섞인 혼합물이라고 말했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 지난날의 나를 번복해야지만 가능한 것일까.
희망적인 건, 삶은 굳건했던 믿음이 깨지면서 윤택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하는 김규진을 마주한 순간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적이었다. 김규진은 국제학교를 다니며 제도권 교육을 착실히 수행한 후 직장에 다니는 30대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일대기를 담은 에세이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출간했는데, 본인의 퀴어한 면모와 함께 보수적인 면모를 적극 어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결혼 적령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프러포즈를 하고, 남들 다하는 공장식 웨딩도 하고, 웨딩드레스도 입고, 아이도 낳아 단란한 핵가족을 꾸리는 모습. 애인이 여자인 것만 제외하면 한국식 생애 주기와 정서를 무리 없이 따르는 보수적인 인물이 틀림없었다. 이 새로운 보수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궁금했다. 추측하건대 김규진에게 동성애는 여느 보통의 욕망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퀴어는 쉽게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의 사랑이 이성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 차이를 끊임없이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애자에겐 향하지 않는 차별이 그놈의 '다른 성애'를 빌미로 발생하니까. 소외란 미세하고도 강력해서 당사자를 숱한 슬픔과 자조 속에 가둔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마주한 관문을 매순간 통과해야 한다. 어느새 성애는 흥망성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축이 되고, 미우나 고우나 1순위의 중요한 자아로 군림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한 성애 말고도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욕망은 많다. 당연히 어떤 욕망은 성애적인 욕망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거대하고 본질적일 수 있다. 마땅히 포기되어야 할 아류 같은 선호는 사실 없는 것이다. 김규진은 퀴어라는 이유로 보수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기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소중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욕망을 수직적으로 줄세워 소거하는 것이 아닌, 수평적으로 나열해 조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한다. 다양한 욕망을 균형적으로 인지하고 존중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다.
(무례한 말이지만) 그녀는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다. 국제 학교, 외국 회사 같은 비교적 친화적인 공간에 속할 수 있었고, 고학력자이고, 미래를 약속한 배우자를 만났으니까. 어쩌면 그녀에게 퀴어라는 정체성은 '부드럽게' 받아들여진 무언가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퀴어도 다양한 욕심을 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특수한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아도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는 동성애라는 별 것이면서 사실 별 것 아닌 문제를 소화하기 바빴던 것 같다. 그 거대한 벽에 둘러쌓여 다른 취향들을 탐욕하지 못했고, 동성애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무엇에 끌리는지 잘 알지 못했다.
현재의 나는 본능적으로 좇게되는 욕망들을 탐색하고 있다. 싱겁지만, 그럴수록 동성애(와 여러 성애)에 더 빠지게 됐다. 나는 계속해서 사랑에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눈 유일한 목적은 잘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더 많은 것들과 더 아름답고 찌질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들엔 일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만이 나를 작동시키는 전언이었다.
그런 나도 사랑에 관한 한 보수적인 것 같다. 혼자 보단 둘 이상이 집단을 꾸리는 게 좋고, SNS보단 직접적인 만남이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옹호하면서도 그만큼 파편화의 가능성을 걱정하고, 독점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힘을 믿는다. 단지 사랑의 가치를 느끼고, 나누고,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존재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보수적인 사랑을 위해 전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비애는 사라질 수 있을까. 퀴어라는 말 앞에 어떤 말이 따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 올까. 못난 퀴어가 되어도 괜찮은 날이 올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본질에 가깝다는 믿음이 다시 한번 새겨진다.
많은 퀴어들이 자신을 더 자신답게 만드는 다채로운 욕망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검열과 모순보단 자유와 가능성을 더 많이 마주하고 실현할 수 있길 바란다. 다양한 형용사로 꾸며진 퀴어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자신의 성애 역시 원하는 만큼 느끼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