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에 빠트리고 싶은 귀인이 있다면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이러다가 으스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아주면 된다. 숨이 막히도록 꽈악. 사랑하는 이의 몸이 한 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살을 파고들 때 나는 무장해제 된다. 그날 몫의 키스가 채워지지 않아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 당연한 말을 덧붙이자면 모든 포옹을 성애적으로 느끼는 건 아니다. 행위 자체가 주는 안정감을 애정한다.
요즘은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누군가를 안아본 적이 오래된 탓일 테다. 너무 안고 싶고 안기고 싶다. 그야말로 포옹 박애주의자로서 '거리두기'의 시대는 무척 힘겹다. 먼 사람은 당연하거니와 가까운 친구들도 좀처럼 몸을 맞대지 않는다. 얼싸안는다는 말은 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사어 같다. 극심해지는 성폭력과 함께 성적 자기결정권의 가치가 대두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때론 신체 접촉은 무조건 피하는 게 정답이라는 분위기가 아쉬울 때도 있다.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어떤 애정도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것 같아서.
황무지에도 단비는 내리는 법. 내 곁엔 포옹을 꺼리지 않는 D가 있다. 어릴 적부터 영어와 여러 문화권에 관심이 많았다던 그녀는 성별에 상관없이 손 인사보다는 가벼운 포옹을 즐겨한다. 낯선 이들과의 가벼운 대화도 서슴지 않는다. '가벼움' 만큼 D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를 찾긴 어려울 것이다. 그녀와 함께라면 퀴어, 페미니즘, 동물권 같은 '무거운' 의제도 일상의 흔한 대화거리로 변주되곤 한다. 좋아하는 책이나 별로였던 음식에 대해 왁자지껄 떠드는 것처럼. 그럴 때면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여러 꼬리표들이, 밋밋한 크리스마스 나무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장식품처럼 느껴진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돌아오기 무섭게 뉴질랜드로 떠나 최근에야 귀국했고 내년에는 아일랜드행을 계획하고 있다. 발까지 잽싼 D에게 한국은 좋은 공항이 있는 경유지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어느 날 D는 세계를 누비는 동안 학교가 허락한 2년의 휴학 기간을 소진해 버렸고 자퇴 원서를 제출했다는 가벼운 일상을 전했다. 과연 졸라 멋있구나. 성공한 사람은 대학을 중퇴한다는 '자퇴 성공 신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나는 D를 더 힘차게 끌어안으며 남은 인생을 너에게 배팅하겠노라 속으로 다짐했다.
D와 포옹을 하고 나면 몸으로 나누는 친밀함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오직 몸의 주파수로만 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그렇게만 채워지는 그릇이 있는 느낌이랄까. 성애적인 맥락과 부담을 내려놓은, 동료 인간으로서의 접촉에 다시 한번 갈증이 느껴진다.
새삼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 없다'는 고리타분한 명제의 힘을 실감한다. 철저한 이성애 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이 문장은 사랑과 우정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사랑과 우정은 다른 영역이고 모든 관계는 사랑과 우정 중에서 양자택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식에서 게이는 깍두기다. 남자 친구가 있는 여성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예외. 실제로 나는 D를 비롯한 여성 친구들과 우리의 사이가 '안전하다'는 감각 속에서 풍부한 교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관계성은 흔히 '게이 남성 = 여성'이라는 도식으로 곡해될 위험성을 가진다. 게이와 여성은 동의어가 아니고 여전히 이성애만을 사랑의 범주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해석이지만, 또 하나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사랑이 아닌 우정에는 로맨틱한 가능성을 1%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나와 여성 친구들이 연인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로맨틱함'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증언은 되려 거짓에 가깝다. 우리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는 애틋한 마음, 따뜻한 애정, 느슨한 소유욕 따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미묘한 감정들은 연인 사이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직 감정만이 근거라면, 나에게 사랑과 우정의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소설가 박상영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단편 <재희>에는 이성애자 여성 '재희'와 게이 남성인 '영'이 등장한다. 그들은 동거를 하며 밤낮으로 남자 얘기를 나누고,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흑역사를 목격하고 견뎌주고 수습해 준다. 누구보다 지긋지긋하지만 무엇보다 끈끈한 인력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사이. 재희의 결혼식 날 영은 축가로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부른다. 항상 나의 곁에 있어 줘. 꼭 네게만 내 꿈을 맡기고 싶어. 이 축축한 관계를 여성과 게이의 우정이라고만 해석하는 건 매우 아쉽다.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들이 나눈 것은 '온갖 비밀을 공유하고 연대하면서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클리셰에 길들여지지 않는 또다른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또다른 사랑. 절묘한 표현이다. 이 말은 성애적으로 얽히지 않더라도 모든 관계는 어느 정도의 로맨틱함을 포함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또다른 사랑이든 그것이 뿌리내리는 지층은 사실 같다. 이를테면 우리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 우리만이 피워내는 유일한 사건들, 우리를 가로지르는 여러 종류의 욕망들. 모든 관계는 이런 보편적인 역사를 경유하여 자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피어난 각 관계의 모양, 그것들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지에 대한 주관적 판단만이 차이를 결정할 뿐이다. 그건 그야말로 미지수의 영역. 유일한 상수는, 축적된 시간은 필연적으로 로맨틱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까 로맨스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또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사랑과 우정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만큼 '사랑'은 명확해진다. 나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명백한 이름을 거부한 로맨스가 만연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명백함을 상실함으로써 명백한 사랑을 증명하는 모순적인 로맨스가. 존재적인 로맨스가. 그런 사랑은 기어코 아름다울 테니까. 꼭 그런 이들에게 내 꿈을 맡기고 싶다. 사랑만이 아닌 사랑을 바라는 것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나의 사랑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