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S에게서 산책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누구에게든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는 거만한 고집이 있는데, 만약 보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그가 만나자는 말을 꺼낼 때까지 정성스레 유도심문을 한다. 대화의 기술이나 마음의 깊이에서 아득히 선배인 S는 나의 얄팍한 속내를 알고도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안다. 그럴때마다 '야, 얼굴 보자'라는 거대한 고백으로 이 빚을 갚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언제나 그렇듯 다짐뿐인 다짐을.
매년 역대급 더위를 갱신하는 기후 재난 시대, 처서가 지나고 시원해진 공기를 탐하려는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졌다. 오늘의 우리도 그랬다. 당장 벌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자연은 아직도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구나, 생각하는 와중 S가 물었다. 산뜻한 마음이 뭐라고 생각해. 산뜻하다는 말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그 의미를 가늠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S에겐 뇌전증을 앓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하루에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는 약이 많고 긴장을 풀었다간 금방이라도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병. 그런 친구가 시도 때도 없이 웃고 다니는 게 S는 신기하다고 했다. 자기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물음에도 웃음을 보였다는 그. 별 거 아니라는 듯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듯 태연했다는 그. S는 그런 그가 산뜻한 마음을 가진 것 같다고 했다.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나는 아느냐고 물었다.
산뜻한 마음. 네가 그에게서 어떤 생명력을 느껴서 산뜻하다는 말을 떠올렸는지 궁금했다. 어영부영 대답했는데, 사실 그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입이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의 살아있음은 죽음이 옆에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그런 생각.
S를 만나기 며칠 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주인공 뫼르소는 세상을 로봇처럼 건조하게 감각하고 서술하는, 쉽게 말해 허무주의적인 인물이다. 21세기의 기술력으로 태어난 로봇이라면 적어도 그보다는 감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이 저마다 품고 있는 사상, 특히 비주류인 그것을 가감없이 펼쳐내는 행위라고 한다면 이방인은 나에게 가장 문학스러운 소설이다. 뫼르소는 나를 이루는 주된 감각과 행동거지가 고스란히 재현된 무엇이었다.
그는 많은 것들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가족과 지인, 문화와 관습 같은 사회 체제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웬만한 사회적 기호는 그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어떠한 감정도 그의 심연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 추측하건데 그것들로부터 상처 받기 전에 먼저 거절하는 것일 테다.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고, 나에겐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으면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픈 자극이니까. 이방인 같은 존재에게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마지막 도피처로 자신의 바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미지의 심연.
S. 내가 너의 친구라면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을 것 같아. 병이 주는 공포가 무서우면서도 이런 감정과 감각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아주 조금은 소중할 것 같아. 두려워 하고 그래서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에겐 필요한 것 같아. 그건 나의 바깥에서 나로 초점이 옮겨지는 것. 그렇게 내가 나라고 불려도 될만큼 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산뜻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병의 도움을 받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야. 나에게 산뜻한 마음은 가까워지는 마음. 그런데 죽음을 담보해야만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삶이 산뜻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나는 눈을 더 가늘고 미세하게 떠본다. 좁아진 시야에는 편하게 느껴지는 것들만이 남는다. 그정도가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느끼고 싶은 전부인건가. 연대하지 않으면, 부지런히 눈을 돌리지 않으면 사라질 연약한 것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내 그릇의 협소한 크기를 깨달을 때면 싫어진다. 무엇이 싫어지는 걸까. 내가? 세상이? 윤리적이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지금까지 이어진 인류의 잔인한 역사가? 퀴어가? 페미니즘이? 비거니즘이? 너무 많은 말들로 점철된 세계의 질서가?
언제부턴가 어떤 죽음을 옆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실체는 없지만 분명히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삶을 누르면서. 그것이 살려고 했던 제스쳐였던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죽음을 느껴야지만 살아 있음을 감각할 수 있는 인간도 있다. 그런고로 산뜻한 마음은 언제나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새삼스레 손에 쥐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물질을 제대로 소화하고 싶다. 멀어지는 것은 불가피할 것 같다. 멀어지지 않을 순 없다. 대신 그만큼 무언가에 다가가 보자는 원칙을 새로 적는다. 그 작은 발걸음이 S, 너를 향한 길로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