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이성애자 친구 M과 섹스에 대해 한참을 떠든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그녀는 답답을 넘어 간절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고민을 들어달라고 했다. M에게는 4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는데, 혹시 모를 임신 가능성으로 한 번도 삽입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콘돔을 껴도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제는 본인도 용기를 내고 싶어 내적 갈등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 갖는 감정들을 다 알 순 없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불안의 불꽃은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애인이 삽입 섹스를 원하지 않아 고민이 많았던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고 곧장 토론의 장을 열었다. 광활하게 훑어지는 복잡다단 인간사. 연애고 섹스고 쉬운 게 하나 없구나.
머리가 어지러워지면 가장 애정하는 연애의 정의를 떠올리곤 한다. 작가 안담은 "연애는 사람인 거 좀 그만해도 되는 유일한 관계 아니야?"라는 명언을 남긴 적 있다. 이 문장이 통쾌한 이유는 연애가 엄청난 난제인 동시에 진귀한 구원이 될 수 있는 매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가족을 포함한 모든 관계에서, 사람 역할을 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당신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무리가 없는 모나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매 순간 신경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보통 속에서 꿈틀거리는 치졸하고 날카롭고 좀스러운 말들을 삼킴으로써 행해진다. 사실 저는 당신의 말과 정반대의 생각들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진부한 얘기를 듣느니 잔디밭에 누워서 책이나 읽고 싶네요. 방금 그 말 너무 별론데요, 죄송하지만 아웃입니다. 같은 말들. 솔직과 무례 어느 사이에 있는 사념들을 내색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내일도 만날 수 있는 사이로 남게 된다.
명확한 끝을 선언하는 게 그리 이롭지 않은 보통의 관계와 달리, 연애는 확실한 종료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사람 역할의 의무감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결국 연애가 고단한 노동이 될지 유일한 구원이 될지는 아이러니한 관계의 법칙을 얼마나 유지하고 벗어나느냐, 그렇게 얼마나 본인들만의 질서를 만들어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M과 그녀의 파트너가 어떤 질서를 만들었는지 물었다. 삽입을 제외한 모든 스킨십은 하고 있고 아쉬움은 있으나 기꺼이이해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얘 이거 자랑질 아니니,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참고 말했다. 삽입은 네가 충분히 편안해졌을 때 할 수 있겠네. 삽입하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면 너도 미안함이 좀 덜하지 않겠니? 친구야, 내가 게이가 되고 확실히 믿게 된 게 있어. 에브리띵 이즈 섹스다.
지금은 전 애인이 된 남자 친구는 삽입 섹스를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게이도 있다. (심지어 적지 않다) 나는 섹스에서 삽입을 꽤나 유의미하게 여겨 속상한 적이 많았는데, 별수 없이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감사하게도 그때 나는 사람의 몸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채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방법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것까지 해도 되나 싶은 것들을 하면 대개 만족스럽다.
이런저런 쾌감의 길목을 말해주는 내게 M은 어느 때보다 귀를 쫑긋 세웠다. 전형에서 벗어난 섹스가 전형적인 섹스에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끼며 섹스의 정의, 몸을 자극하는 여러 방법론 따위에 대해 실컷 떠들었다. 우리 테이블 바로 뒤에 앉았던 남자 네 명은 이 흥미로운 광경을 어떻게 기억했을지 문득 궁금하다. 몸만 만져도 섹스라는 둥 젤을 사용하면 신세계라는 둥 떠들어 댔던 수상한 남자와 여자를.
오래도록 섹스 토크를 나누며 알았다. 섹스에 대한 대화는 그 관계의 법칙을 만들고 합의하고 조정하는 핵심 과정이다. 남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은밀하고 어딘가 변태적인 질서를 짜내는 것. 그 멋쩍고 수치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견뎌주는 것. 그것이 가능할 때 서로를 끌어당기는 엉터리 법칙은 잠자리를 넘어서 먹고, 자고, 싸고, 응원하고, 증오하고, 용서하는 일상으로 번져간다. 섹스는 그렇게 관계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결국 섹스에서 중요한 건 삽입의 여부만은 아니다. 우리만의 지침 아래에서 모두가 충분하고 안전한 쾌락을 누렸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섹스의 완성은 삽입이 아닌 모두의 만족 그 자체다.
몇 달 뒤 만난 M은 편안하고 조금은 기세등등한 얼굴을 보였다. 나 했다. 헉, 정말? 지지배 난 아직 못 해봤는데 또 너만 앞서나가는구나. 건강하게 섹스에 대해 떠드는 것과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인 거구나. 얼마 안 가 울상을 지으며 M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내 모습이 훤하게 그려졌다. 야, 나도 하고 싶어.
* 글을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딥페이크 성범죄로 수많은 여성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내가 펼친 이야기는 이 사회에선 뜬구름 잡는 환상에 불과한 것만 같다. 무력하다. 분노를 느낀다. 남성이 쉽게 가해하고 여성이 쉽게 피해 입는 세상의 질서에,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더 공고해지도록 방관하는 세계에,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빈약한 성 의식에. 음지에서 고약하게 자라나는 섹스에 비해 양지 위의 섹스는 상상력이 말라버린 것만 같다. 섹스가 트로피가 되어 버린 지금, 우리에겐 섹스를 그리는 비옥한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 있을지 지금의 나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