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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해 Oct 07. 2024

3. 나는 아직 더 벗고 싶다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목소리엔 항상 '과도한 노출'이 있었다. 그 단어들이 같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궁금한 게 많았는데 가령 과도하다는 건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노출은 왜 하는 것이며, 노출은 어떻게 비판의 근거가 되느냐는 것 따위였다.


자기 몸을 자신이 선택할 권리, 유교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는 신세대의 문화처럼 설명할 수단은 많겠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심리적인 동기였다. 무엇보다 나도 퀴어 축제에 가면 조금이라도 더 몸을 드러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민소매를 입는 게 최대한의 노출이지만.


노출에 대한 해묵은 질문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한 뉴질랜드 여행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때는 두툼한 패딩도 뚫어버리는 냉기로 가득한 12월. 며칠 뒤면 지긋한 추위도 작별이라는 기대감에 들뜨며 얼마 없는 민소매를 전부 챙겼다. 앞서 말했듯 나에겐 그조차 큰 결심을 해야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에 꽤나 공격적인 코디네이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생 최장기간 최다 노출을 목전에 앞둔 나는 비장해졌는데, 뉴질랜드 주민들은 동양 유교보이의 긴장을 친히 풀어주었다.


행인 중 열에 넷이 과도한 노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는 탑, 가운데 단추 두 개만 잠근 셔츠, 다양한 길이의 레깅스, 3부 바지 혹은 상의 탈의. 여긴 마트인데, 아파트 앞인데, 어린 애들도 있는데. 선생님들은 한국에 가면 죄다 고소당할 것이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바다와 호숫가에 갔더니 그런 농담은 나오지도 않았다. 뚱뚱하고, 마르고, 근육질이고, 장애가 있고, 어리고, 늙은 사람들이 일제히 옷을 벗고 있었다. 전라는 아니지만 전라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살들의 향연 속에서 내 허름한 민소매는 정갈한 피케 티셔츠처럼 보였다. 놀이공원에 정장을 입고 간 것처럼 괜한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첫날엔 예의상 민소매를 입고 입수했던 나는 이후로는 바지만 입고 수영을 했다. 차가운 물이 곧장 살에 부딪치며 허리를 감싸안았다. 한참을 물놀이를 하곤 해변에 드러누웠다. 등과 배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모래와 햇빛이 포근했다. 자연과 몸을 맞댄다는 건 충만해지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날은 클럽에 가기로 했다. 각자의 캐리어 속에서 핫걸, 핫보이로 둔갑하기 위한 옷들을 찾느라 분주했다. 거듭 고민을 하는 내게 M은 강아지가 입을 법한 셔츠를 꺼내더니 네가 입으면 예쁠 것 같다며 툭 건네주었다. 미처 빠지지 않은 유교 정신이 다시 올라왔다. 아무래도 너무 핫하지 않을까. 네가 핫한 걸 못 봤구나. 넌 축에도 못 껴. 그래, 우리 몸을 깐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지. 그 사람들 이상하지 않았지. 결국 셔츠를 입었다. 조금이라도 팔을 들면 배가 훤히 드러나 어기적거리며 움직여야 했지만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나는... 흥분했다. 막상 클럽에 있는 남정네들은 대부분 반팔과 반바지를 입어 배신감이 들었지만, 누구도 내 셔츠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으니 핫보이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M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트와 바다와 클럽을 오가며 느꼈던 건 무엇보다 해방감이었다. 그건 몸을 내보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놀라움이자 몸이 어떠한 잡음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기도 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어떤 비난을 받을지 날카롭게 세웠던 신경이 누그러지자 내면의 말초적인 감각에 집중하게 됐다.


따뜻하다. 까슬거린다. 졸리다. 책 읽고 싶다. 바다에 뛰어들고 싶다. 춤추고 싶다.


스멀스멀 욕망이 떠올랐고 차근차근 시행했다. 마치 몸의 완벽한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옆의 당신들은 재단하는 눈이 아니라 따스한 무관심의 눈을 가졌구나. 당신들의 그 눈을 통해서 나는 더욱 나다워질 수 있었구나. 사람의 눈이 이럴 수도 있구나.


어디를 가나 발견할 있는 너그러운 얼굴을 마주하며 배웠다. 몸은 자체로 의미가 없는 덩어리일 수 있다는 것을. 몸에 대한 인식 중 상당 부분은 분명히 학습과 문화의 산물이다. 벗은 몸이 야하다고 말하는 몸을 자신이 야하게 보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에서 '노출 = 야함'으로 치환하는 것이 오히려 변태적인 시선이 아닌지 묻게 된다. 벗은 몸이 문제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몸의 소유주보단 몸을 바라보는 사람의 의지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결국 몸의 해방은 정신적인 해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내 몸을 해방시킨다는 건 당신의 몸을 깨끗하게 바라보겠다는 의지이며 당신도 나의 몸을 깨끗하게 바라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시끄러운 논란에서 벗어난 고요함, 온전하게 느껴보는 자기 통제 같은 감각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게 아닌가. 깨끗한 존중은 공평한 눈을 약속할 때 가능하다.


노출하느냐는 물음이 무색해졌다. 왜 노출하면 안 되는가, 그러니까 당신은 왜 나를 투명하게 존중하려 하지 않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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