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퀴어는 정체성만을 구분하기 위한 용어인가?
- 그렇다면 퀴어는 '퀴어가 아닌 사람'에겐 가치가 없는 개념인가?
앞으로 써 내릴 글들은 두 물음에서 시작했다. 2년 전 나는 게이가 되었다.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남자를 사랑했고 혼란했고 인정했다. 이 짧은 문장에 압축된 서사를 푸는 건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던 나를 퀴어라고 여기게 된 사건은 기억하는 한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큰 탈선이다. 나는 정갈하게 놓인 철로 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따라가려는 사람에 가깝다. 어떤 선택이든 앞선 이들이 안전을 보장한 루트를 의심 없이 뒤밟는 게 편했다. 그러면 적어도 미움받을 일은 적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퀴어라니. 퀴어라는 꼬리표 앞에 내가 쌓아온 모든 역사가 무색해질까 두려웠다. 친절하든 지혜롭든 예의가 바르든 종국엔 이해하기 힘든 불순분자로 통용될까 무력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쳇바퀴질 하는 게 남들이 말하는 소수자라는 거였을까. '퀴어 차별 엄청 문제적이네'라며 열을 내던 와중, 이 사회는 특별히 퀴어만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닦아진 정상으로의 길을 벗어난다면 누구든 아주 공평하게 쳐내는 게 우리네 세상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겪는 고통은 단지 퀴어라는 이유에서 유래한 것인가. 혹시 허용된 범주를 넘어섰다는 이유에서 유래한 건 아닌가.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건 분야를 막론하고 위험한 발상임은 틀림없다. 취향과 적성보다는 대세를 따르는 선택에 확실한 보상이 쥐어지고 나머지는 철저한 무관심과 배제로 응답하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남들을 따라가기 위해 애쓰고 행여 삐끗할까 불안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학습되어 있다. 그렇다면 퀴어로서의 차별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폭탄 돌리기에 당첨된 것이 아닐까. 퀴어는 폭탄을 떠안는 수많은 명분과 계기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 나는 퀴어가 보편적인 감각과 매우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퀴어가 단순히 정체성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사랑하는 대상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좋아할지 선택하는 건 인간이라면 시시때때로 수행하는 절대 원칙에 가깝다. 퀴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변화는 선호 그 자체보다 선호가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변화. 나는 특수한 정체성보다는,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유사한 변화들에 주목하고 싶다. 변두리의 자아를 갖는 것은 불편과 위험을 감내하는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희미해진 개인을 또렷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세상의 시선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무언가가 나에게 있고 누구도 아닌 내가 존중해야 하는 고달픈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숙명은 매섭게 짓누르며 고통을 주지만 때론 나와 상대를 애틋하게 여기는 눈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 시력은 사랑을 재건할 훌륭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체성을 초월하여 소외된 적 있는, 그러니까 못다한 말과 행동을 품은 적 있는 모두라면 이 처연한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퀴어를 '주류에 속하지 않는 모든 변두리의 존재'로, 퀴어한 사고를 '비주류를 새롭게 인식하고 존중하는 모색'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퀴어만의 영역을 외면하면서까지 보편성에 집착하고 있다. 이 발칙함은 그것을 수호하는 훌륭한 이야기꾼이 많다는 걸 알기에 가능했다. 그들에게 빚지며 이 시리즈에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퀴어한 감각으로 세상에 접속하는 모습을 그려보려 한다. 내 세계가 퀴어함을 매개로 어떻게 뒤틀리고 겨우겨우 넓어지는지 관찰하고 싶다. 이 작업으로 규범에 꼭 들어맞지 않는 저마다의 별난 면모들을 여러 빛깔로 조명하고 싶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상한 타자를 이해하는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는 걸 증언하고 싶다. 단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