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 증명되지 않는 윤리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 방식

by 하진
pond-3776437_1280.jpg ⓒ Pixabay

흔히 철학에 집중하면 우울해진다고들 하지만, 도저히 사유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감각에만 깊게 침잠하면 정신이 어딘가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 철학이 묻는 것은 언제나 근원적이며, 근원은 언제나 거대한 어둠을 동반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왜 이성을 갖춘 듯 움직이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밀어내는가.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틈에서 전혀 새로운 고유성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철학은 이 질문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인간이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질문들은 결국 모순과 신비를 동시에 끌어안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증명 가능성’이라는 단단한 벽 앞에서 언젠가는 결론을 강요받는다.


예컨대 영혼이나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해보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든다. 반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생의 기억처럼 설명되지 않는 정합성, 혹은 이해를 벗어난 신비한 현상들을 근거로 그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 자체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어떤 영역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의미는 허구이며, 삶은 자기완결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다. 이성의 끝을 너무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은 종종 허무주의로 떨어지고, 삶의 이유를 잃는다.


삶의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이 빛을 너무 빨리 벗겨버렸기 때문이다. 의미를 설명하려는 순간 의미는 증발하고, 기쁨을 분석하는 순간 기쁨은 이유를 잃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비를 붙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끝내 붙들지 못한 채 논리와 공허 사이를 서성이게 된다.


그때 인간은 이성과 비이성이 마주치는 경계에서 길을 잃는다. 설명과 침묵 사이의 좁은 틈을 오가며, 스스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짚어보려 한다. 결국 인간이란 생물이 본질적으로 동물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작은 기적이 탄생한다.


남의 것을 침탈하지 않겠다는 것, 생명을 고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알지 못했어도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인간다움의 미약한 본능들. 이것들이야말로 윤리의 출발점이며, 윤리가 죽어가는 시대에도 끝내 남아 있으려는 마지막 숨결이다.


윤리가 죽는다는 것은 윤리의 종말이 아니라, 윤리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이나 제도, 혹은 이성적 규칙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윤리는 구조 속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내부의 어둠과 충동, 모순과 신비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폭력성을 부정하지 않고, 신비를 억지로 설명하지 않고, 이성이 닿지 못하는 지점을 외면하지 않을 때—윤리는 비로소 새로운 숨을 얻는다. 죽어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윤리가 외부에서 주어진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온 시대다.


윤리는 이미 오래전에 외면당했으나, 그 죽음 위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탄생의 방식은 언제나 그렇듯, 설명되지 않는 어떤 현상처럼, 예고 없이 우리 곁에 스며들 것이다. 이 글을 ‘윤리의 죽음’ 시리즈의 마지막에 두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학적사유 #허무와의미 #현상학적질문 #이성의한계 #존재론 #감성과이성의충돌 #윤리 #심연 #폭력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8화18장. 회복되는 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