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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말해지지 않은 불편함

말하고 나면 다들 맞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을까

by 하진
ⓒ Pixabay

“중간에 불쾌해서 덮어버렸어.”

“좀 이상했지, 영혜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눈 대화다. 다들 묘한 불편함을 느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하진 않았다. 말하고 나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아무도 먼저 말하지않았을까? 나는 그 순간이 이상했다. 말해지지 않은 어떤 긴장. 그리고 그 침묵이 익숙해질 때, 우리는 어떤 폭력을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혜의 고통은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드러나지 않는 통제와 침묵이,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그녀를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이어쩌면, 폭력에 무감각해진 사회에 대한 은밀한 고발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해석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세계라면, 그녀를 끝내 살려두는 것이 오히려 진짜 폭력 아닐까?”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면 하나하나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그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감각만큼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도 영혜와 닮아 있다. 두 인물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낙인을 찍힌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가장 정직하게 세계에 반응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 인간의 존엄보다 규범과 정상성이 먼저 여겨지는 사회야말로, 진짜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말을 꺼내면 모두가 수긍했지만, 그 전까지는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다시 침묵하게 되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침묵은 어느새 무언의 긍정으로, 침묵 속 익숙해진 폭력은 ‘그저 그런 일’로 자리 잡을 것 같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언젠가는 ‘잘못됐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비극이 너무 자연스럽게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과민하게 반응한 건 아닐까 의심했다. 투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학 한 편에 이렇게 깊이 감정이 흔들리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도 『채식주의자』 를 여러 번 반복해 읽지 않았다면, 그 고통을 끝내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하지 못한 폭력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감지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 감각을 외면할 수는없었고,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혹시 이미 누군가 이 문제를 말한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논문과 서평들을 찾아 읽었다.


『채식주의자』 를 깊이 분석한 글은 드물었지만, 그중 유독 반복해서 인용되는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에마뉘엘 레비나스다. 그는『전체성과 무한』 에서 윤리의 출발을 타자의 얼굴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요청하고, 나는 이미 요청받은 자로서 응답해야 한다.


‘얼굴이 도달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한 고통은 무시되어도 되는 걸까.’


여기서 지인들과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그들은 장면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요청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짚어내진 못했다. 누군가는 이상함을 감지했고, 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확실한 건,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얼굴’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윤리적 감수성의 차이가 아니다. 예컨대, 노예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에도 누군가는 처음으로 그 부당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 감각은 도덕적 판단도, 윤리적 의식도, 요청도, 법도 아니었다. 말로 설명된 논리가아니라, 말해지기 전에 이미 흔들렸던 무언가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중요한 층위는 기존 윤리 담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침묵하는 윤리’를 언급하긴 했지만, 침묵 속 구조화되지 않은 고통을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언어는 부재했다. 그리고 사실, 나 역시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존재했던 윤리의 가능성. 문제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않으면, 윤리는 도래하지 못한다. 공적 질서에 포착되지 않으면 ‘기분 탓’으로 치부되거나, ‘예민함’으로 축소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삭제된다. 그렇게 사라진 감응은 인식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있었지만, 없었던 것.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것.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졌고,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는 호출되지 못하는 감응.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윤리는 실패하고 있었다. 내가 느낀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말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개입이 필요했다.


그 질문은 나를 철학으로 이끌었다. 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 을 통해 언어보다 먼저 작동하는 세계의 층위를 처음 마주했다. 철학은 말해지지 않는 윤리의 공백을, 사유 가능한 언어이자 개념으로 바꿀 수있는 유일한 학문으로 보였다.


사실, 문학이나 에세이로 접근했다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느낌을 경험하게 만들고, 시는 고통의 결을 전달하기 좋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그것들은 표현으로 환원된다는 것에 있었다. 감응은 ‘표현’으로 분류되고, 표현은 ‘주관’으로 처리된다. 결국 사회는 이를 개인의 감정이나, 과잉 반응으로 취급하며 밀어낼 것이다.


윤리가 구조 밖으로 밀려나는 문제를 붙잡기 위해, ‘결촉(結觸)’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윤리는 응답이나 책임이 가능해지기 훨씬 이전, 이미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철학자도 윤리학자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지만,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그 감응의 자리만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 ‘결촉(結觸)’은 임하진이 2025년에 제안한 철학적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타자적 감응의 실패 구조를 사유하는 이름이며, 그 개념적 구조를 존중하며 비평·확장·비판해주신다면 감사히 열어두고자 합니다.


다음 편 예고

내 주변에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줄 사람이 없었다. 정말 안 해본 게 없었다. 친구의 친구, 교수님의 지인, 아빠의 연락처, 사촌들 중 전공 여부까지 확인하며 줄줄이 수소문했다. 하지만 철학자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 분야를 깊이 있게 다뤄온 한 철학 박사님께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다. 평소 책으로만 접해오던 분이라, 더 망설여졌지만… 고민한 끝에 보낸 메일이었다. 그리고 몇 주 뒤, 뜻밖에도 답장이 도착했다.


참고사항

1) 한강,『채식주의자』: 이 소설은 ‘정상성’이라는 규범이 어떻게 아무런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존재조차 위협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은, ‘비정상’이라는 판단을 통해 작동한 사회적 통제였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되어왔지만, 내가 위기감을 느낀 것은 그 감각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과,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대부분은 그 이상함을 지나쳐버린다는 사실이었다.


2)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전체성과 무한』에서 윤리를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내가 이미 요청받은 자로서 응답해야 하는 비대칭적 관계"로 설명한다. 이때의 요청은 나보다 먼저 도착한 윤리의 선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속 저작인 『존재와 달리』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를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나는 이미 타자에게 열려 있고, 흔들리고, 무너지는 존재다. 즉, 요청이 도달하기도 전에윤리적 감당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주로 『전체성과 무한』의 구조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했으나, 이후 레비나스의 ‘요청 이전’ 사유에 접하면서, 침묵의 구조를 더 깊이 탐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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