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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철학자에게 보낸 메일

비어있는 윤리의 공백, 개념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by 하진

이전 편에서는

말해지지 않은 불편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어서 지워졌던 윤리의 가능성이었다. 나는 말해지지 않은 윤리를 붙잡고자, '결촉(結觸)'이라는 철학 개념을 고안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이를 검토해 줄 철학자가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고민 끝에 한 철학 박사님께 메일을 보냈고,뜻밖에도 답장이 왔다.


그것이 내 생각을 다시 밀어붙일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고, 이 사유의 리듬을 지탱하게 한 조용한 기준점이 되었다. 학문적 권위에 기대는 인상이나, 사적 대화를 인용하는 일이 혹시라도 예의에 어긋날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의 사유의 중요한 지점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이 자리에 남긴다.




ⓒ Pixabay

철학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제목은 “도달할 수 있지만 도달하지 못한 감각은 윤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요?”였다. 문학에서 출발해서 윤리적 실패를 느낀 것 같다는 내용을 구구절절 적었다. 내 투사나 착각이 아니라면 요청 이전의 층위가 필요할 것 같다는 내용과 함께 PDF파일을 첨부했다.


지금 브런치에 올려둔 파일과는 달리, 이때는 느낌만 옮겨적은 에세이에 가까웠다. 나름 최선을 다해 썼지만,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말이 되려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건 나도 안다. 그런데, 그것이 명확하게 표현되었더라면, 나는 개념을 묶고 정리하는 과정 어딘가에서 분명히 한 번쯤은 그것을 붙잡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면, 필요한데 있어야하지 않나? 이런 생각으로 보낸 메일이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있어야 하는 게 없어서 썼다. 그리고이미 있을수도 있었다.


윤리는 틀이 잡히는 순간 사라지지만,틀이 잡히지 않으면 승인 받을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이 모순을 은유적 언어로 감싸며 사유를 지속했지만, 어쩌면 그는 말해지지 않은 채 배제되어온감각들이 언젠가 추적될 수 있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

결촉(結觸)은 그 말해지지 않은 감각들이 실제로 존재했을 수 있었던 구조를 추적하며, 윤리의 출발을 ‘응답’이 아니라 ‘감당’이라는 가능성에서 다시묻는다.

그 감각은 실현되지 않았고, 해석되지않았으며, 판단되거나 전이되지 않았지만 존재했을 수 있었던 가능성으로 남는다. 결촉의 감각은 ‘나에게 도달하지 않았지만, 도달할 수 있었던 가능성 속에 머무르는’ 감각이다.

- 메일에 첨부한 PDF 중 일부


그렇게 메일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2주 뒤 답장을 받았다. 그 안엔 “직관이 유의미해 보이기는 합니다”는 언급과 함께, 학문 체계와 훈련에 대한 조언, 그리고 개념에 대한 의문점들이 있었다.


가령, “감각이 도달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감각은 내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바깥에서 도달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처럼. 엄청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함께였다. 다른 철학자들도 요청 이전을 말했다는 점이라던가. 그런데, 유독 인상 깊었던부분은, 레비나스도 감당을 강조했었다.


판단 이전의 감각이 윤리의 기반이라는 생각은 정확히 레비나스적 생각입니다. 하진씨의 레비나스 이해는『전체성과 무한』의 얼굴의 윤리에 기반한 것 같더군요. 레비나스의『존재와 달리』에서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레비나스는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존재 이전에서 윤리의 기반을 찾으려고 합니다(그것은 내가 보기에, "요청" 이전이기도 합니다.).

하진씨의 아이디어와 비슷한 생각을 발전시킨 바 있으니, 공부해 보면 어떨지요. 이 책은 『전체성과 무한』보다도 훨씬 어렵긴 합니다. 레비나스도『존재와 달리』에서 감당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능동성 철저히 없이, 단지 겪는 것을 뜻하지요. 이 점도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서없이 많은 말을 했는데, 양해 부탁합니다.
좋은 봄날 되기를 빕니다.

- 철학자 님께 온 메일 내용 중 일부

이후, 바로 책을 읽어보았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달리』 에서 이미 와버린 타자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나’. 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그에게 있어서 윤리는 자율적 결단의 주체가 아니라, 도망칠 수없는 무게를 이미 감당하는 자다.


언어가 굉장히 난해하긴 했는데, 느낌은 생생하게 전해졌다. 투사일수도 있지만, 글자너머의 슬픔, 무너지는 순간의 절박함, 자아의 붕괴에 대해서ㅡ 거스를 수 없는 책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침입하는 타자. 그런 것들을 주요 핵심으로 삼아 읽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요청을 감당하는 자는 불균등하다. 그리고, 그건 보편화되지 않으므로 체계와 제도에 포섭되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여기엔 가장 윤리의 근본적인 무언가가 숨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윤리의 구조로 끌어낼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지만, 찾아내고 싶었다. 그 이후로는 종일 이 생각에 몰입했다. 어떤 날에는 오전 5시에 눈을 떴는데, 문득 시계를 보니까 오후 11시 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남자친구는 나에게 조현병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조현병 증상을 찾아보니까 음성 증상 4개중전부 해당되었다. 그중에서는 철학에 대한 과몰입도 있다. 딱, 나였다. 그런데, 나는 정신병이 있더라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정신병 유무가 아니라, 마음이 동하는지와 추구하는 가치가 맞는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조현병에 대한 생각


조현병자는 자신이 병자인걸 모른다는 보편적 인식이 있다. 여기서 나는 묻는다. 내가 모든 증상에 해당함에도 병이 있다는 그 사실을 부인할 때, 그것은 내가 병자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가? 내가 정신병을 인식하는 주체라면 나는 병자일 수 있는가?


정신병의 기준치란 과연 절대적인가? 사회가 정한 ‘기능’과 ‘기준’을 넘지 못하면 정신병자인가? 그 완벽한 기준을 누가 정했는가? 정상은 다수결에 의한 것인가, 권력에 의한 것인가? 정신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상성의 통제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


‘정신병’이라는 개념조차 사회에서 제기능을 하는가와 주변인과 전문가의 판단, 그리고 ‘보편적 기준치’에 따라서 너무나도 쉽게판단된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 이 말을 틀리다며 반박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나는 나의 모자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반박하는 순간, 자신의 편협한 시각과 무지함만을 드러내는 꼴이 아닌가? 그러므로,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태껏 사유해온 시간이 무의미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을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 편 예고

문학 속에서 조금만 시선을 반전시키면, 우리는 생각보다 조용한 폭력에 얼마나 무감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놀라운 건, 윤리를 말하려는 나조차도 그 폭력을 비켜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편에서는『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파헤쳐볼 것이다. 참고로 나는 네 번째 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혜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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